요즘 새삼스럽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출간되어 화제를 빚고 있다. 지금 우리는 '다수결 원칙'이라는 마법에 걸려있는 형국이다. 사실상 정의는 다수결의 원칙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칠은 언젠가 이 다수결에 대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무식했던 것을 처음 알았다'는 말을 남긴 일이 있다.

우리 집에서도 외식하러 갈 때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르게 된다. '오늘 외식은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하는 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 원칙에 찬성하지 않는다. 같이 가되,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찾아먹자는 주의다. 그리고 차를 마실 때, 어느 찻집에서 몇 시에 만나자는 약속만 하면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는 다수결원칙주의다. 모든 권력은 다수에서 나온다. 다중 속에서 소수는 항상 찬밥신세가 된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소수주의가 한때 득세를 한 바 있지만, 지금은 난센스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랑도 하나'라는 노래도 없지 않지만, 하나는 불안한 덧니 같은 느낌이다. 우리들 머리 속에 다수라는 망령이 녹아든 탓이다.

수업 때문에 계모임에 몇 번 빠졌더니, 회원들의 성화가 대단했다. "하필 수업이 있는 날과 겹쳐서 그렇게 되었으니, 한두 번은 몰라도 매번 계모임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그때마다 결근계를 내고 빠질 수가 없었다고 하니, 어쩌겠나,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한 사람이 따라야지, 계원들 모두가 한 사람 의견을 따를 수야 있겠느냐"고 한다.

"늘 수업이 겹친다면 수업, 즉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는데"하고 웃었더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설마 그런 논리를 밀고 나가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회의는 그렇게 결말이 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특정 요일에 수업을 몰아넣은 탓에, 계모임에 나가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기이한 논리가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과 진흙이 묻지 않는 연꽃같이,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도 있다. 성공한 이들의 공통점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고집쟁이들이 아니었던가. 성공하기 위해선 당신만의 '示(시)너지'를 키우라는 말도 있고 《사소한 차이가 성공의 차이》란 책도 있다. 이인식 교수는 '대형참사에서 생존법'이란 글에서 사람이 운집한 곳엔 가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성인이라는 정의도 '聖(성)'자에는 남의 말을 잘 듣고 말을 가려서 하라는 의미에서 '耳(귀)'와 '口(입)'이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품위를 나타내는 '品(품)자'는 입이 셋이다. 필요없는 말을 경계한 탓이다. 많은 입들이 모아졌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정의가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철저하게 자기다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기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른바, 나이아가라 증후군을 앓아서는 안 된다. 정신없이 삶의 대열에서 흘러가다가 나무 등결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의 참다운 정체를 잊은 채, 군중과 더불어 생존선상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존 아닌 자기 생활을 발견하지 못한 탓이다. 에디슨이나 이순신, 카네기나 스티브 잡스 같은 분들은 철저하게 자기식대로 살아간 지독한 고집쟁이들이다. 그레고리 번스는 "상식파괴자들은 또 다른 상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한국적 '전설의 고향'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미호(九尾弧)조차 유형화되면 싫은 것이 아닌가.

궁녀도, 삼천궁녀쯤 되면, 거세해야 할 내관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계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거수기는 자의인가 타의인가. 하기야 언젠가 심 봉사도 눈 뜰 날이 있었으니까. 그래 많은 사람보다 홀로 자기 스스로 바꾸기가 쉬운 법이니.

하길남 < 수필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