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는 덕목 중 하나가 '상생(相生)'이다. 그러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자는 상생이 정반대로 편가르기를 은연 중 조장하는 경우를 본다. 편가르기 정서는 공교육,공영방송,공익광고처럼 과도한 '공(公)' 개념에서 생겨난다(본지 7월6일자 A39면 시론).상생이야말로 공적 기여를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덕목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상생은 사적 욕망을 저버린 채 공익에 헌신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적 욕망을 폄하하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 편을 가르고 반목하는 정서를 부추기게 된다.

최근 대통령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을 강조하고,특히 '전국경제인연합회도 대기업의 이익만 옹호하려는 자세를 가져서는 곤란하며 사회적 책임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전경련과 정부 당국자 간 만남에서 오해는 풀어졌다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해명과 쓴소리가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대립하는 존재로 보는 한,대통령이 강조하는 상생은커녕 당사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편가르기 정서,그리고 이미 그릇되게 만연한 대기업에 대한 반감만을 북돋게 할 뿐이라는 점이다.

정치적 제스처에 그칠 것이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진정으로 상생을 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두 가지는 반드시 시정돼야 한다. 하나는,사적 욕망을 부도덕한 것으로 보고 공적 기여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사적 욕망과 공적 기여는 상호 대립된 것이 아니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사적인 욕망이 발전의 원동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사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한다. 마찬가지로 기업도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립하는 것이다. 기업이 공적 기여를 하는 것은 기업이 이윤을 많이 남긴 결과에 좌우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구도로 보아서는 안 된다. 특히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군림하는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얼마 전까지 공익광고란 형태로 왜곡 방송됐던 '학부모와 부모'가 대립의 관계가 아니듯이,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모두 기업이다. 중소기업이 성장해 대기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놓아야 한다.

상생을 위해 필요한 것은 개인이 잘 되고,기업도 잘 돼야 한다는 정서이다. 모든 선진국들이 강한 기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강한 기업은 경쟁력 있는 기업이다. 기업이 경쟁력을 갖춰 상생하기 위한 요건이 있다.

첫째,경쟁력 있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 그러려면 무임승차,공짜점심 심리를 조장하는 교육체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경쟁력 없는 획일화된 '공교육' 대신에 학교마다 갖고 있는 교육의 관점이 온전히 자리잡아야 한다. 그래야 학교가 다양한 사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학교선택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평준화정책의 폐지와 선발권 및 등록금 책정을 완전 보장하는 대학자율화는 이를 위한 핵심 전제이다.

둘째,남이 잘되는 풍토를 격려 · 권장해야 한다. 흥하는 이웃을 보고 배 아파 할 것이 아니라,자신도 이를 본 받아 분발하는 풍토가 돼야 한다. 이것이 상생의 요체가 아닌가. 돌이켜보면 잘된 기업가가 애국자였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누구보다도 성공한 기업가들이 구국의 대열에 동참했다.

셋째,대외무역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 문제에서도 폐쇄적인 사고를 버려야 한다. 상생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갉아먹어 잘됐다'는 식의 오도된 인식에선 이뤄지지 않는다. 프랑스계 대형 유통업체인 까르푸가 물러간 것은 재래시장의 힘이나 막연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내 대형마트의 경쟁력 때문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정래 < 부산교대 교육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