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스위스은행에 6억2400만달러를 은닉했다가 적발됐다. 얼마나 교묘하게 돈세탁을 했는지 이 돈을 회수하는 데 18년이나 걸렸다. 모부투 세세 세코 전 콩고 대통령,사니 아바차 전 나이지리아 대통령,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도 비슷한 방법으로 비자금을 관리했다. 불법으로 모은 비자금을 독재권력 유지를 위해 쓰거나 권좌에서 밀려난 이후를 대비해 쌓아뒀다는 게 공통점이다.

스위스은행에 숨겨뒀다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비자금 40억달러의 대부분은 얼마전 룩셈부르크은행 등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스위스 정부가 돈세탁 규제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비자금 만들기에 나선 것은 1974년부터다. 조선노동당 중앙위 산하 비서국 소속 '39호실'을 설치하고 통치자금 조성을 담당하도록 했다.

평양 도심의 6층짜리 회색건물에 자리잡은 노동당 39호실은 그야말로 특별한 곳이다. 산하에 해외지부 17개,무역회사 100여개를 비롯해 은행까지 거느리고 있다. 기관별 충성자금,송이버섯 같은 특산물 수출,호텔 · 외화 상점 운영 등으로 돈을 끌어모은다. 100달러짜리 위조지폐인 '슈퍼노트' 제작,무기와 마약 밀매 등 편법 · 불법 외화벌이도 총괄하고 있다.

비자금의 상당액은 김 위원장 일가의 호화생활비와 고위층의 충성 유도를 위한 선물 등에 쓰인다고 한다. 또 핵 · 미사일 개발 등 김 위원장이 직접 지시한 국책 사업에도 '배려 자금' 명목으로 배정된다는 분석도 있다. 2008년 북한이 사들인 고급 양주,승용차 등 사치품만 1억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엔 애완견과 개사료도 포함돼 있다. 지난 4월15일 김일성 생일을 앞두고는 중국에서 고급 승용차 200여대를 수입하기도 했다.

북한은 비자금을 늘리기 위해 올초 39호실장을 김 위원장의 고교 친구인 전일춘으로 교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다. 미국이 대북 금융제재에 착수,동남아 유럽 중동 등지에서 불법혐의가 있는 수백개의 계좌 추적에 나섰기 때문이다. 2005년보다 제재 강도를 더 높일 것이라니 노동당 39호실의 활동도 큰 제약을 받을 게 뻔하다. 핵개발,천안함 폭침 같은 도발과 비자금 조성에 열을 올릴수록 국제사회 고립으로 북한 주민들의 고통만 더 심해질 테니 안타깝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