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40여년에 걸쳐 펼친 대결은 결국 베르니니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승패를 가른 것은 실력이 아니라 처세의 능력이었다. 베르니니가 곰살궂게 윗전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아랫사람을 당근과 채찍으로 리드한데 반해 보로미니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교황 혹은 후원자에게 툭하면 대들고 고집을 피웠다. 그의 실력은 자타가 공인했지만 까탈스러운 품성 때문에 어느 새 기피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에게 한번 일을 맡겼던 사람은 좋은 건축물을 얻은 기쁨보다는 그에게 당한 정신적 고통에 넌더리를 쳤다. 게다가 아랫사람 챙기는데 인색해서 한번은 임금지불을 까맣게 잊어 인부들이 모두 공사현장을 떠나버린 적도 있었다.

이러한 양자의 성격 차이는 베르니니에게는 주문 폭주로,보로미니에게는 주문 급감으로 나타났다. 결국 보로미니는 예수회 교육기관인 콜레조 디 프로파간다 피데의 건축을 마친 1667년 실의에 빠져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반대로 베르니니는 당대 최고의 미인과 결혼해 11명의 자녀를 얻었고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문 82세의 천수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