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가고파' 詩心 찾아 떠난 길…그대, 최치원 읊조림은 들었는가
국립 3 · 15민주묘지 묘역에 오른다. 3 · 15 의거를 형상화한 '정의의 벽' 부조를 바라보면서 작고한 이선관 시인의 시 '역시 마산은 이 땅의 변방이 아니라는'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여기가 구암동 애기봉 중턱/ 아직도 두 눈을 부릅뜨고 누워 있는/ 아 1960년 3월15일 그날/ 죽어도 살아 있음이여'. 애기봉에 잠든 31위의 넋이 내게 말한다. "우리는 오늘 네가 누리는 자유의 DNA 속에 살아 있다"고.

내려오는 길에 고려 우왕 4년에 배극렴이 왜구를 막으려고 쌓았던 합포성지에 잠시 들렀다가 회원동 이산(鯉山) 기슭 법성사에 닿는다. 대웅전에는 목조보살좌상(경남 유형문화재 제472호)이 봉안돼 있다. 삼존불 중 우측에 좌정한 협시불이다. 보현 보살로 추정되는 이 보살은 연꽃 가지를 손에 들고 있으며 화관이 몹시 화려하다. 불단 우측에는 동진 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신중들이 그려진 액자 형태의 신중탱(경남 문화재자료 제445호)이 걸려 있다. 동진 보살은 부처가 세상에 나투실 때면 맨 먼저 설법을 청하는 분위기 메이커다.

◆민주묘역에서 의림사까지

이산 맞바라기 산호공원에는 이은상을 비롯해 '고향의 봄'의 이원수,동요 '산토끼'의 이일래 등 마산 출신 시인들의 시를 새긴 '시의 거리'가 있다. 마산항의 '그 파란 물'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 있는 이은상의 '가고파' 시비를 읽는다.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 왔더라면 친일의 오명 따윈 남기지 않았을 것을….

완월동 성지여중 안에 있는 성요셉성당(경남 문화재자료 제283호)은 1928년 유리오베르문 신부가 지은 석조건물로 경남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건축이다. 로마네스크식과 르네상스식 건축양식을 절충한 이 아담한 성당은 바라보는 이를 억압하거나 군림하려 들지 않는다. '므흣'한 마음으로 바라보노라니 '천주교 수위 시절/ 밤중에 수녀관 담에서/ 나를 부르던 찬모 아줌마/ 그 뜨거운 옥수수빵 한 조각에/ 나는 이 세상 사랑을 배웠다'는 장영수의 시 '묵상'이 떠올라 가슴 한 구석이 뜨거워진다.

월영대가 있는 경남대 정문 앞 댓거리를 찾아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월영대는 회원현 서쪽 바닷가에 있다. 최치원이 놀던 곳이니,글을 새긴 돌이 있으나 벗겨지고 부서졌다(月影臺 在會原縣西海邊 崔致遠所遊處 有名刻脫落)'라고 적고 있다.

최치원(857년~?)의 자취가 어린 월영대는 후세 선비들의 순례지였다. 안축,정지상,이황 등 숱한 인물들이 다녀갔다. 이곳에 온 안축은 '바닷가 축대에 경치가 기이하니/ 물결을 비추는 밝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이지러졌을까// 다시는 읊조리지 말라,고운의 시구를/ 예나 지금이나 어진 인재라도 한 때뿐인 것을'이라고 무상한 생을 노래했다.
[감성 여행] '가고파' 詩心 찾아 떠난 길…그대, 최치원 읊조림은 들었는가

현재 월영대는 바닷가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달 그림자가 비추지 않는 월영대는 제 정체성을 잃었다. 최치원이 자물쇠를 채운 채 수행하는 무문관에라도 드셨는가? 월영대에는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다.

여항산 기슭,의림사는 마산에서 가장 유서 깊은 절집이다. 원래 봉국사라 했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사명대사 휘하로 숲처럼 모였다 하여 의림사가 되었다 한다. 들머리에서 조선시대 사리탑으로 추정되는 부도 3기와 수인사를 나눈다. 가운데 부도의 제액에는 '한유당(閑遊堂)'이라 새겨져 있다. '한가함이 나의 할 일'이라 여겼던 스님이신가. 6 · 25 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던 의림사는 대웅전 · 염불당 · 나한전 · 삼성각 · 요사 등의 전각만을 갖춘 조촐한 절집이다.

염불당 앞에는 이중 기단 위에 조성된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경남 유형문화재 제72호)이 서 있다. 모서리가 깨진 지붕돌들이 의림사의 파란곡절을 말해 주는 듯하다. 삼성각 왼쪽에는 250년이나 된 모과나무(경남 기념물 제77호)가 있다. 사람의 이두박근처럼 울퉁불퉁 골이 파이고 껍질은 벗겨져 녹색의 구름무늬를 띤 줄기가 신령스럽다. 자신을 찾아온 햇볕 · 바람 · 빗방울 · 안개를 군소리 없이 품어준 늙은 나무가 내게 포용이라는 덕목을 가르친다.

◆어시장 · 아귀 거리 · 복요리 거리

마산 어시장으로 '고고싱'이다. 횟집골목 · 젓갈골목 · 건어물골목 등에는 갈치 · 낙지 · 대구 · 장어 · 가오리 · 돌문어 · 개불 · 해삼 · 멍게 · 전복 · 도다리 · 넙치 · 우럭 등 반찬거리에서 횟감에 이르기까지 없는 생선이 없다.

마산하면 아귀찜과 복요리가 떠올라 오동동 아귀찜 골목과 복요리 골목을 기웃거린다. 한때는 잡자마자 버렸던 복어와 아귀가 이제는 귀하신 몸이 되었다. 복어는 이름도 참 많다.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는 복어를 '돈어'라 했고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는 배를 부풀리는 물고기라 하여 '기포어' 또는 '폐어'(肺魚)라 했으며,등이 옥처럼 매끄럽다 해서 '대모어'(代瑁魚)라고도 했다.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독을 가진 복어는 팜파탈이다. 복어의 맛을 '죽음과 바꿀 수 있는 맛'이라고 극찬했던 송나라 소동파 시인의 후예들은 지금도 극단까지 복어 맛을 추구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처음에 밤새껏 마신 주당들의 쓰린 위를 달래주는 '복국'으로 출발했던 마산의 복요리는 10여년 전부터 다양해졌다. 입소문을 타고 손님들이 몰려들자 복불고기 · 복껍데기 무침 · 복튀김 · 복수육 · 복초밥 등 새로운 메뉴를 개발한 것이다.

아귀는 《자산어보》에 조사어(釣絲魚)라고 나오는데 속명을 아구어(餓口魚)라 했다. 생전에 복 마니아였던 우리 아버지와는 달리 난 아귀찜을 더 좋아한다. 시원함보다는 얼큰함에 더 끌리는 체질이다.

돝섬행 유람선을 타려고 월포동 연안여객선터미널로 갔다. '돝'은 돼지의 옛말이다. 손에 잡힐 듯 빤히 바라다보이는 돝섬에는 금돼지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섬이 금빛에 휩싸이면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는데 최치원이 월영대에서 활을 쏴 섬의 금돼지를 잡은 뒤론 그런 일이 없어졌다는 것.필시 전기소설 《최고운전》과 월영대를 연관시켜 최치원의 영웅적인 모습을 부각하려는 전설일 것이다.

돝섬행 유람선은 운행을 중단한 지 오래였다. 하릴없이 선착장으로 나아가 돝섬을 바라보았다. 섬이 뭍으로 헤엄쳐 오는 한 마리 돼지 같다. 남동 연안으로 눈을 돌리자 마산자유무역지역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1899년에 개항한 마산항은 1970년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됨으로써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지난 7월1일,통합창원시의 일원이 됨으로써 마산이란 지명은 역사의 타임 캡슐 속으로 사라졌다.

안병기 여행작


■여행 팁

마산 회원구 추산동에 있는 마산시립문신미술관(055-220-6550)은 파리에서 활동했던 추상조각의 거장 문신(1923~1995)이 남긴 조각,유화,데생 등 290여점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과 1월1일,설과 추석을 빼고는 항시 문을 열어두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면 마산 회원구 봉암동과 창원시 신촌동에 걸쳐있는 봉암갯벌을 찾는 것도 권할 만하다. 이곳에는 각종 염생식물과 50여종의 철새,게,갯지렁이가 집단서식하고 있다. 오염물질의 자연정화장 역할을 하는 갯벌의 소중함을 직접 체험하는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 추억으로 가는 웰빙음식

마산 아귀찜의 특징은 생아귀가 아니라 숙성시킨 아귀를 쓴다는 점이다. 그늘에서 꼬들꼬들 말린 아귀를 토막 친 다음 콩나물ㆍ미나리ㆍ된장ㆍ찹쌀가루ㆍ마늘ㆍ생강ㆍ고춧가루와 특유의 양념을 넣고 버무려서 찜통에 쪄낸다. 마산 아구 할매집(055-241-2566)이 추천할 만하다.

복어의 참맛을 즐기려면 매운탕보다는 맑은국이 제격이다. 가다랑어 육수를 써서 달짝지근한 일본식 복지리보다 복어 대가리를 넣고 푹 고아낸 국물에 콩나물ㆍ미나리ㆍ마늘 등을 듬뿍 넣고 끓인 우리식 복국이 훨씬 시원하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복집은 오동동 복집 골목 들머리의 남성식당(055-246-1856)이다.

진해 출신 정일근 시인은 '시는 맛'이란 시에서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 사는 맛도 독든 복어를 먹는 일이다/ 기다림,슬픔,절망,고독,고독의 독 맛/ 그 하나라도 독으로 먹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는 맛은/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복요리를 먹고 나서 후식으로 시인이 설(說)하는 삶의 레시피를 맛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