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경기 성남시장은 12일 기자회견에서 채무 지급유예의 주요 이유로 '재정난'을 꼽았다. 그는 "판교특별회계에서 차용해 쓴 5200억원을 당장 갚을 능력이 안 된다"고 했다. 이 시장은 그러면서 전임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번 재정 위기는 본질적으로 전임 집행부가 무리하게 대단위 사업을 하면서 돈을 무분별하게 썼기 때문에 벌어졌다는 것.이 시장은 "전임 집행부가 지난 4년간 판교특별회계에서 5400억원을 가져다가 신청사 건립이나 공원로 확장 등 '불요불급'한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그처럼 대단위 사업을 벌이면서 지방세율을 낮춘 것이 화를 키웠다고 덧붙였다. 예전 같았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경기 침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세율을 낮춤으로써 '세입은 줄고 세출은 크게 느는' 처지에 몰리면서 재정 악화가 돌이킬 수 없게 됐다는 것.

거기다 판교신도시 조성 사업과 그 주변 사업을 위해서만 써야 할 판교특별회계를 일반회계로 끌어다 쓰면서도 현실성 있는 변제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전임 집행부를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 같은 선언의 배경에 정치적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시장은 갚을 돈에 대해 5200억원을 언급했지만 실제 올해 갚아야 할 돈은 1000억원에 불과하다. 성남시 1년 예산이 1조7000억원인 데 비하면 큰 돈이 아니다. 이 시장이 조용히 해결할 수도 있는데 문제를 떠들썩하게 키우고 있다는 것.또 일부에서는 이 시장이 특별회계에 한정된 사안을 다분히 정치적 용어인 '모라토리엄'이란 단어까지 사용한 데 주목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 이유를 '선긋기'에서 찾고 있다. 전임 시장이 벌인 사업의 비용을 당장 자신이 책임질 이유가 없기 때문에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자신의 공약을 집행하기 위해서 미리 손을 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진상 성남시청 정책실장은 "이 시장의 공약을 이행하려면 시립병원 설립에 1000억원,구시가지 공원 부지 매입에 3000억원, 분당~수서도로 지하화에 2000억원,미금 환승역 설치에 1000억원 등 최소 1조원 이상이 든다"며 "만약 판교신도시 조성사업비 정산이 완료되는 이달 안에 당장 채무를 갚는다면 사실상 (이 시장의 공약)사업은 하나도 못하게 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이 시장이 내건 핵심 공약에는 △위례신도시 · 보금자리주택(시흥 · 신촌 · 고등동) 사업권 확보 △시립병원 설립 △도시개발공사 설립 △시청사에 24시간 탁아시설 운영 △구시가지 제1공단 공원화 △사회적기업과 주민조합 지원으로 일자리 창출 △SSM(대형슈퍼마켓) 입점 허가제 도입 △분당~수서 간 도로지중화 사업 등이 포함돼 있다.

한편 이대엽 전 시장은 전후사정을 들어보기 위해 하루종일 연락을 시도했으나 휴대폰을 꺼둬 연락이 되지 않았다.

민지혜/박신영 기자 spop@hankyung.com

◆이재명 시장은 누구

이재명 시장(45)은 성남 중원구 상대원공단에서 일하던 중 산재 사고를 당한 뒤 고입 · 대입 검정고시를 2년 만에 끝내고 중앙대 법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인권변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2006년 지방선거에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아 정치에 입문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민주당 부대변인을 거쳐 이번 6 · 2 지방선거에서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 용어풀이 ]

◆모라토리엄(Moratorium · 채무 지급유예)=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만기 내 빚을 갚지 못할 때 일시적으로 상환기간을 연기해 달라고 대외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빚을 언젠가는 갚겠지만 현 상황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니 지급시한을 미뤄 달라는 요구다. 보통 나라 간 관계에서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만 최근엔 정부기관 간,기업 간 관계에서도 이 용어를 쓴다.

모라토리엄 선언 후엔 통상 외국의 채권 금융기관과 협의해 빚을 탕감받거나 만기를 연장하는 '채무재조정(rescheduling)'과정을 거친다. 브라질 등 남미 국가들이 1980년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적이 있고,1982년에는 멕시코가 3개월 동안 대외채무 지급유예를 선언한 적이 있다.

◆디폴트(Default · 채무불이행)=모라토리엄이 '나중에 천천히 갚겠다'는 선언이라면,디폴트는 돈이 없어 아예 빚을 못 갚는 상황을 의미한다. 기업에서 디폴트가 발생하면 통상 부도 처리된다. 국가도 외환보유액이 모자라 정부가 직접 지거나 지급 보증한 빚을 갚지 못하면 디폴트 상태가 된다.

박수진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