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은퇴하면 뭘 할 것인지 남편과 가끔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영순위는 손자손녀를 키우자는 것이다.

직장 생활 16년째,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이 일상이다. 새롭게 만나는 분들이 조심스레 하는 질문,"혹시 결혼하셨나요?" 이때만 되면 이미 내 얼굴은 흐뭇한 웃음이 가득해지고 능청스럽게 "아니요!"가 나온다. 그러다 보면 상대는 다음 말을 덧붙인다. 가정이 있으면 이렇게 활동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하지만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엄마"하고 여기저기서 달려오는 딸아이가 셋이다. 하루 동안 무슨 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완전히 잊어버릴 만큼 행복한 순간이다.

첫째는 시댁에서 키워 주시고 둘째는 친정에서 키워주셨다. 셋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드디어 한집에 모였고 능숙한 베이비시터의 보살핌 속에 세 아이의 성장을 보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가늠도 못해보고 너무도 감사하게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지난 일요일 MBTI 성격유형 강연 참석차 서울에 다녀왔다. 뭘 준비해야 손자손녀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틈틈이 하는 공부다. 대전역에 다시 도착해 시댁과 친정에 한 주간의 안부 전화를 돌렸다. 늘상 반갑게 하이톤인 시어머님 목소리에는 경북 구미 무을마을의 산천 바람이 담겨있었다. "아버님이 너희들 보러 가셨다. 살구가 잘 익어 오늘 내내 좋은 것만 골라서 몇 상자 만들었는데 상추와 대파도 내가 챙겨 보냈다. "

순간 집에 밥이 있나? 아버님 저녁을 어쩌지….남편은 밖에서 먹으면 되지 뭔 걱정이냐고 핀잔을 주지만 상추 가져오신 분께 바깥 음식은 영 예의가 아니다 싶어 맘이 분주해진다. 그런데 손위 시누이가 벌써 맛있는 식사를 아버님께 대접하고 있다는 전화 한 통.오! 구세주가 따로 없다.

남편과 함께 아이들 고모댁으로 바로 갔다. 살구가 얼마나 먹음직스러운지 군침이 돌고,싱싱한 상추에 웃음꽃 피는 정겨운 식탁은 금세 밥 한 그릇 뚝딱.연이어 삶은 감자까지 호호 불며 먹었다. 싱그러운 고향의 기운이 담긴 살구를 손자손녀에게 묵히지 않고 바로 먹이겠다고 2시간을 운전해서 오신 시아버님의 구릿빛 얼굴에는 웃음이 만연했다. 노화에도 좋고,피로회복에도 좋으며,변비에도 좋다는 전문가 뺨치는 설명까지 곁들이면서 언젠가 우리 부부가 돌아갈 고향 소식도 전하신다. 인생 친구 같은 세 딸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의 행복은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도 손자손녀를 많이 낳았으면 좋겠다. 지금부터 키울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의 가장 큰 소원은 건강한 삶이다. 다섯 가족이 탐스러운 살구를 먹으며 씨를 모아 다시 시부모님께 드리려고 챙겨둔다. 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그 대를 이어 우리도 그리 살 것이란 무언의 약속을 하면서.

최선미 한국한의학연구원 본부장 smchoi@kiom.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