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 장년층의 어린 시절 축구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메뉴가 돼지 오줌보와 볏짚 공이다. 동네 빈터에서 이 야릇한 공을 차고 놀다 보면 발을 다치기 일쑤였다. 19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공인구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국제대회에서도 각양각색의 공이 사용됐다. 1930년 제1회 월드컵 결승전 때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서로 자국에서 만든 공을 써야 한다고 우겼다. 결국 전반엔 아르헨티나산,후반엔 우루과이산을 쓰는 절충안을 택했다.

축구공의 역사는 완벽한 구형을 만들려는 노력의 역사다. 검은색 오각형 12개와 흰색 육각형 20개로 만든 '텔스타'가 멕시코월드컵에서 선보인 이래 탄성과 비거리,회전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1978년 아르헨티나 대회 때는 20개의 삼각형과 12개의 원으로 디자인한 '탱고'가 등장했다. 놀라운 반발력을 지녔다 해서 '요술볼'로 불리며 1998년까지 기본틀이 유지될 정도로 장수했다. 2002년 한 · 일 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는 혁신적인 디자인과 높은 정확성을 자랑했고,2006년 등장한 '팀 가이스트'는 32개였던 조각을 14개로 줄인 다음 고열 · 고압에서 본드로 붙이는 특수공법으로 제작돼 화제를 모았다.

남아공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는 한술 더 뜬다. 8개의 폴리우레탄 조각으로 원형에 더 가깝게 만들어졌다. 표면에 홈을 파서 공기저항을 최소화했고 미세한 특수 돌기를 넣어 발로 찰 때 느낌도 좋다고 한다. 한마디로 작은 힘으로도 빠르게 멀리 날아가는 공이란 얘기다.

다만 너무 민감해서 탈이다. 남아공 경기장 상당수가 공기저항이 적은 고지대여서 어디로 날아갈지 예측하기 어려운데다 튀는 방향도 일정치 않다는 거다. 제조업체인 아디다스는 FIFA 기준에 맞췄다고 주장하지만 선수들은 불만을 쏟아낸다. 지난 13일 잉글랜드와 알제리 골키퍼가 평범한 중거리 슛에 실점한 것도 자블라니의 불가측성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17일 밤 한국-아르헨티나 전이 벌어질 사커시티 스타디움도 해발 1753m의 고지대에 있어 '자블라니 리스크'가 적잖게 작용할 전망이다. 같은 힘으로 차도 그리스전 때(해발 20m)보다 10m가량 더 나간다고 한다. 거리와 타이밍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게 뻔하다. 그래도 우리 선수들의 사기가 높다니 다행이다. 고지대에 자블라니 리스크를 딛고 후회없는 한판을 벌이길 기대한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