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인물탐구 -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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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은 싫어요" 아빠 구두 닦고 월급 받던 막내딸
"딜러는 시시해" 獨 MCM 인수해 '명품CEO'로
"딜러는 시시해" 獨 MCM 인수해 '명품CEO'로
"아빠,구두 반짝반짝하죠? 앞으로 매일 닦을 테니 월급 주셔야 해요. " "허….그거 참.네 나이에 뭔 돈이 필요하노.정 필요하면 용돈 줄 테니 닦지 말그래이."
1963년 어느 날 서울 동소문동에 자리잡은 '돈암장'.이승만 전 대통령이 해방 직후 2년 동안 머물렀다는 유서 깊은 저택의 현관 밖으로 아버지와 어린 딸이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故) 김수근 대성그룹 창업주와 막내 딸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54).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김 회장이 출근길에 나선 아버지를 상대로 '임금 협상'을 벌인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던가. "그냥 주시는 돈은 안 받겠다"는 딸의 고집에 아버지는 매달 300원씩 월급을 주기로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에는 '아버지 손수건과 서류가방 챙기기' 업무를 추가로 '수주'하면서 '월 급여'를 500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김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이랬다. 재벌가의 딸로 태어났지만,그냥 주어진 '편안한 삶'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막내 딸을 "이상한 놈"이라고 불렀지만,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수적이었던 아버지가 "여자가 무슨 공부냐.결혼만 잘하면 되지"라고 타일러도 그는 끝내 해외유학을 떠났고,"여자가 바깥일을 하면 안 된다"며 대성그룹 입사를 허락하지 않았을 때는 창업을 통해 스스로 길을 만들었다. 김 회장이 맨손으로 시작해 연매출 2100억원 안팎의 글로벌 명품 브랜드 MCM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도전정신 덕분이었다.
○부유한 어린 시절
7남매 중 막내 딸로 태어난 김 회장은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1962년 매입한 돈암장은 대지면적만 2446㎡(740평)에 달하는 저택이었다. 하지만 씀씀이가 헤픈 집안은 아니었다. 김 회장은 "어린 시절 입은 옷은 전부 두 언니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며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게 한이 돼서 패션업계에 발을 내디딘 것 아니냐'고 지금도 농을 친다"고 말했다.
대성가(家)는 '수재 집안'이었다. 큰 오빠(김영대 대성 회장)와 둘째 오빠(김영민 SCG그룹 회장),셋째 오빠(김영훈 대성그룹 회장) 모두 서울대를 나왔고,두 언니도 각각 서울대 미대와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김 회장이 고교 2학년이던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넷째 오빠가 대학 입시에 낙방한 걸 비관해 '생을 마감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받은 정신적 충격은 김 회장이 연세대 신학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다
대학 졸업 무렵 김 회장이 가장 원했던 것은 '탈출'이었다. 1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명문대인 앰허스트에 합격했지만,역시 아버지는 유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3일 동안 단식투쟁을 해도 아버지는 꿈쩍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떠난 유학생활은 김 회장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1981년 앰허스트대를 졸업한 뒤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원(LSE)을 거쳐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1985년의 김 회장'은 더 이상 부모님이 조종할 수 있는 '착한 딸'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한다'는 생각이 자리잡았던 것.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버드대에서 만난 영국계 캐나다인과 결혼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재벌가 막내딸'이기를 포기한 대가는 혹독했다. 아버지는 그를 '버린 자식'으로 취급했고,학비와 생활비도 끊었다. 수중에 가진 돈은 1800달러.김 회장은 학업을 포기하고 백방으로 직장을 찾았다. 지인의 소개로 얻은 첫 직장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명 백화점인 블루밍데일이었다.
○명품업계에 입문하다
블루밍데일은 '패션 사관학교'로 불릴 정도로 미국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는 백화점이었다. 4년 동안의 블루밍데일 생활은 김 회장을 '패션 전문가'로 거듭나게 해줬지만,체력적으로는 '그로기' 상태로 만들었다. 1989년 김 회장이 모든 것을 버리고 10여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오로지 '쉬고 싶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명품업체들이 블루밍데일에서 훈련받은 패션 전문가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구찌였다. 체력이 되살아날 즈음 구찌 본사를 방문해 한국 내 딜러 계약을 맺었다. 다행히 한국이 명품에 눈을 뜨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사업은 번창했다. 내친김에 이브생로랑 소니아리키엘 MCM 등 다른 명품 브랜드도 들여왔다. 그가 거느린 매장 수는 88개로 늘었고,연간 매출은 500억원을 훌쩍 넘겼다.
○위기,그리고 MCM 인수
1997년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수입업자'인 김 회장을 코너로 몰아넣었다. 해외 본사에 결제할 금액이 순식간에 두 배로 뛰었기 때문이었다. 손실 규모는 300억원에 달했다.
구조조정을 늦출 수 없는 상황에 몰린 김 회장은 구찌의 한국 영업권을 270억원을 받고 본사에 되파는 등 공들여온 브랜드를 하나둘씩 내보냈다. 다만 독일 MCM은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국내에서 생산까지 담당했던 만큼 끝까지 붙들고 있기로 했다.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인근 사무실을 내주고 경기도 김포의 공장 창고로 옮기던 날,김 회장은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 열심히 일해서 5년 뒤에 MCM 본사를 인수합시다"라고.
김 회장은 우선 한국 시장에서 MCM을 메이저 브랜드로 키워나가기로 했다. 다행히 한국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면서 2000년 100억원대에 머물렀던 매출은 5년 만에 600억원대로 불어났다. 반면 글로벌 시장에서 MCM의 위상은 날로 추락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어느 날 살펴보니 한국에서 건넨 수백만달러의 로열티가 본사를 먹여 살리고 있더라"며 "5년 전 농반 진반으로 얘기했던 'MCM 본사 인수'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수차례 협상 끝에 MCM 본사를 인수했지만,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독일인들은 동양인 여성을 새 주인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김 회장과 한국인 스태프들을 우습게 봤던 것이다. 김 회장은 '악'소리가 날 정도로 가차 없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MCM이 달라졌다"는 건 소비자들이 먼저 알아봤다. 미국 유럽 등 전 지역의 매출이 상승하기 시작한 것.현지 언론들은 "독일 남자가 못한 일을 한국 여성이 해냈다"고 대서특필했다. 김 회장을 무시했던 독일 직원들의 눈빛이 변한 건 당연했다. MCM은 현재 30개국 300여개 매장에서 2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모든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겠다"
김 회장은 지난 3월 성주그룹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성주재단'을 설립했다. 북한 동포와 국내 소외계층을 돕기 위해 김 회장과 성주그룹 등이 20억원을 출연해 만든 것이다.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는 김 회장의 인생철학이 담긴 산물인 셈이다. 김 회장은 "외동딸에게 '유산은 꿈도 꾸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한다"고 말했다.
50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며 하루 24시간 중 15시간씩 일한다는 김 회장.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올까.
"사람들은 뚜렷한 목표가 없을 때 피로감을 느낍니다. 달성하고 싶은 꿈이 있다면 하루에 3~4시간만 자도 피곤하지 않아요. 제 목표는 MCM을 '부잣집 마나님'이 아닌 전문직 남녀가 가장 갖고 싶어하는 럭셔리 브랜드로 만드는 겁니다. 10년이면 충분합니다. 그 다음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명예롭게 은퇴할 겁니다. 어린 시절 '재벌가 막내딸' 타이틀도 버렸는데,이 정도쯤이야….하하."
오상헌/안상미 기자 ohyeah@hankyung.com
1963년 어느 날 서울 동소문동에 자리잡은 '돈암장'.이승만 전 대통령이 해방 직후 2년 동안 머물렀다는 유서 깊은 저택의 현관 밖으로 아버지와 어린 딸이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故) 김수근 대성그룹 창업주와 막내 딸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54).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김 회장이 출근길에 나선 아버지를 상대로 '임금 협상'을 벌인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던가. "그냥 주시는 돈은 안 받겠다"는 딸의 고집에 아버지는 매달 300원씩 월급을 주기로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에는 '아버지 손수건과 서류가방 챙기기' 업무를 추가로 '수주'하면서 '월 급여'를 500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김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이랬다. 재벌가의 딸로 태어났지만,그냥 주어진 '편안한 삶'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막내 딸을 "이상한 놈"이라고 불렀지만,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수적이었던 아버지가 "여자가 무슨 공부냐.결혼만 잘하면 되지"라고 타일러도 그는 끝내 해외유학을 떠났고,"여자가 바깥일을 하면 안 된다"며 대성그룹 입사를 허락하지 않았을 때는 창업을 통해 스스로 길을 만들었다. 김 회장이 맨손으로 시작해 연매출 2100억원 안팎의 글로벌 명품 브랜드 MCM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도전정신 덕분이었다.
○부유한 어린 시절
7남매 중 막내 딸로 태어난 김 회장은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1962년 매입한 돈암장은 대지면적만 2446㎡(740평)에 달하는 저택이었다. 하지만 씀씀이가 헤픈 집안은 아니었다. 김 회장은 "어린 시절 입은 옷은 전부 두 언니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며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게 한이 돼서 패션업계에 발을 내디딘 것 아니냐'고 지금도 농을 친다"고 말했다.
대성가(家)는 '수재 집안'이었다. 큰 오빠(김영대 대성 회장)와 둘째 오빠(김영민 SCG그룹 회장),셋째 오빠(김영훈 대성그룹 회장) 모두 서울대를 나왔고,두 언니도 각각 서울대 미대와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김 회장이 고교 2학년이던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넷째 오빠가 대학 입시에 낙방한 걸 비관해 '생을 마감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받은 정신적 충격은 김 회장이 연세대 신학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됐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다
대학 졸업 무렵 김 회장이 가장 원했던 것은 '탈출'이었다. 1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명문대인 앰허스트에 합격했지만,역시 아버지는 유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3일 동안 단식투쟁을 해도 아버지는 꿈쩍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떠난 유학생활은 김 회장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1981년 앰허스트대를 졸업한 뒤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원(LSE)을 거쳐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1985년의 김 회장'은 더 이상 부모님이 조종할 수 있는 '착한 딸'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한다'는 생각이 자리잡았던 것.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버드대에서 만난 영국계 캐나다인과 결혼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재벌가 막내딸'이기를 포기한 대가는 혹독했다. 아버지는 그를 '버린 자식'으로 취급했고,학비와 생활비도 끊었다. 수중에 가진 돈은 1800달러.김 회장은 학업을 포기하고 백방으로 직장을 찾았다. 지인의 소개로 얻은 첫 직장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명 백화점인 블루밍데일이었다.
○명품업계에 입문하다
블루밍데일은 '패션 사관학교'로 불릴 정도로 미국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는 백화점이었다. 4년 동안의 블루밍데일 생활은 김 회장을 '패션 전문가'로 거듭나게 해줬지만,체력적으로는 '그로기' 상태로 만들었다. 1989년 김 회장이 모든 것을 버리고 10여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오로지 '쉬고 싶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명품업체들이 블루밍데일에서 훈련받은 패션 전문가를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구찌였다. 체력이 되살아날 즈음 구찌 본사를 방문해 한국 내 딜러 계약을 맺었다. 다행히 한국이 명품에 눈을 뜨는 시점과 맞물리면서 사업은 번창했다. 내친김에 이브생로랑 소니아리키엘 MCM 등 다른 명품 브랜드도 들여왔다. 그가 거느린 매장 수는 88개로 늘었고,연간 매출은 500억원을 훌쩍 넘겼다.
○위기,그리고 MCM 인수
1997년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수입업자'인 김 회장을 코너로 몰아넣었다. 해외 본사에 결제할 금액이 순식간에 두 배로 뛰었기 때문이었다. 손실 규모는 300억원에 달했다.
구조조정을 늦출 수 없는 상황에 몰린 김 회장은 구찌의 한국 영업권을 270억원을 받고 본사에 되파는 등 공들여온 브랜드를 하나둘씩 내보냈다. 다만 독일 MCM은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국내에서 생산까지 담당했던 만큼 끝까지 붙들고 있기로 했다.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인근 사무실을 내주고 경기도 김포의 공장 창고로 옮기던 날,김 회장은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 열심히 일해서 5년 뒤에 MCM 본사를 인수합시다"라고.
김 회장은 우선 한국 시장에서 MCM을 메이저 브랜드로 키워나가기로 했다. 다행히 한국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면서 2000년 100억원대에 머물렀던 매출은 5년 만에 600억원대로 불어났다. 반면 글로벌 시장에서 MCM의 위상은 날로 추락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어느 날 살펴보니 한국에서 건넨 수백만달러의 로열티가 본사를 먹여 살리고 있더라"며 "5년 전 농반 진반으로 얘기했던 'MCM 본사 인수'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수차례 협상 끝에 MCM 본사를 인수했지만,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독일인들은 동양인 여성을 새 주인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김 회장과 한국인 스태프들을 우습게 봤던 것이다. 김 회장은 '악'소리가 날 정도로 가차 없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MCM이 달라졌다"는 건 소비자들이 먼저 알아봤다. 미국 유럽 등 전 지역의 매출이 상승하기 시작한 것.현지 언론들은 "독일 남자가 못한 일을 한국 여성이 해냈다"고 대서특필했다. 김 회장을 무시했던 독일 직원들의 눈빛이 변한 건 당연했다. MCM은 현재 30개국 300여개 매장에서 2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모든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겠다"
김 회장은 지난 3월 성주그룹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성주재단'을 설립했다. 북한 동포와 국내 소외계층을 돕기 위해 김 회장과 성주그룹 등이 20억원을 출연해 만든 것이다.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는 김 회장의 인생철학이 담긴 산물인 셈이다. 김 회장은 "외동딸에게 '유산은 꿈도 꾸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한다"고 말했다.
50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며 하루 24시간 중 15시간씩 일한다는 김 회장.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올까.
"사람들은 뚜렷한 목표가 없을 때 피로감을 느낍니다. 달성하고 싶은 꿈이 있다면 하루에 3~4시간만 자도 피곤하지 않아요. 제 목표는 MCM을 '부잣집 마나님'이 아닌 전문직 남녀가 가장 갖고 싶어하는 럭셔리 브랜드로 만드는 겁니다. 10년이면 충분합니다. 그 다음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명예롭게 은퇴할 겁니다. 어린 시절 '재벌가 막내딸' 타이틀도 버렸는데,이 정도쯤이야….하하."
오상헌/안상미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