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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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 | 백선엽 지음 | 월간 아미 | 512쪽 | 2만5000원
90세 전쟁영웅의 회고록
90세 전쟁영웅의 회고록
"사단장 각하,적이 공격해 내려왔습니다. 전방은 대혼란에 빠졌고 개성은 이미 적에게 떨어진 것 같습니다. "
1950년 6월25일 아침 7시.백선엽 육군 제1사단장 장군은 서울 신당동 집에서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사단 작전참모인 김덕준 소령이었다. 백 장군은 사단장 부임 이후 전방 진지 보강공사를 서두르다 고급간부 교육명령을 받고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느라 서울에 있던 참이었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6사단과 1사단 전방을 공격했다. 1사단은 38선에 배치된 4개 사단 중 좌익 사단으로 황해도 청단,연안,배천을 거쳐 개성,고랑포,적성에 이르는 90㎞를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전차를 본 적이 없었고,대(對)전차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다.
병력의 절반가량이 외출 · 외박을 나간 일요일 새벽의 기습 공격에 병사들은 당황했다. 더구나 전차라는 새로운 무기에 병사들은 첫날부터 '전차공포증'에 시달렸고,전차라는 말만 들어도 겁에 질려 사기를 잃어버렸다.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6 · 25 전쟁의 전쟁영웅인 백선엽 장군(90)의 회고록이다. 일제강점기 나라 없는 땅에서 태어난 백 장군의 90년 삶은 파란만장하다. 만주국 장교로 복무하다 해방을 맞았고,1946년 국군 창설의 주역으로 참여했다. 6 · 25 발발 후 휴전에 이르기까지 3년1개월여 동안 사단장,군단장,참모총장의 중책을 수행하며 단 하루도 일선을 떠나지 않았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는 벼랑 끝에 몰린 조국을 구하려고 최일선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진두지휘했고,북진작전 때는 미 1군단장을 설득해 작전명령을 바꿔가며 고향인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자 아시아 최초의 야전군 창설 임무를 맡았고,전역한 후에는 대만 · 프랑스 · 캐나다 대사와 충주비료 사장,노근리사건 진상조사 자문위원장 등을 맡아 쉼 없이 일했다.
그는 이 책의 절반가량을 6 · 25 전쟁에 할애했다. 일요일 새벽의 기습 남침과 사흘 만의 서울 함락,군대로서의 기초도 갖춰지지 않은 군대를 이끌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던 일,북진과 평양 탈환,중공군의 개입과 눈물 어린 1 · 4후퇴,휴전회담,공비 토벌을 위한 '백(白)야전사령부' 창설,국군 최초의 대장 진급과 휴전에 이르기까지 긴박했던 전쟁 기간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낙동강 방어선에 배수진을 치고 조국의 명운을 걸었던 다부동 전투는 그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전쟁사에도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당시 병사들은 밤낮 없이 계속되는 전투에 지쳐 있었고,보급마저 끊겨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기진맥진한 상황이었다.
8월21일 아침,적이 선제공격을 가해왔다. 11연대 1대대 병력은 벌써 적군에게 쫓겨 후퇴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미8군 사령부에서는 "도대체 한국군은 싸울 의지가 있는 군대냐"며 항의전화가 걸려왔다. 즉시 지프를 몰고 11연대 전방으로 달려간 백 장군은 이렇게 병사들을 독려했다.
"내 말을 잘 들어라.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후퇴할 곳이 없다. 물러서면 바다뿐이다. 후퇴하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 미군들은 우리를 믿고 우리를 위해 싸우는데 우리가 먼저 후퇴하다니,이 무슨 꼴인가. 대한의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내가 앞장서겠으니 나를 따르라.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쏴라!"
결국 그의 부대는 다부동을 지켜냈고,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덕분에 국군은 반격의 토대를 확보했다. 그는 6 · 25 전쟁의 교훈을 이렇게 들려준다. 사전에 준비하라,진두에서 지휘하라,극한 상황 속에서도 부하의 사기를 올려라,연합작전의 중요성을 인식하라,한국 지형에 맞는 전략 · 전술을 개발하라,통일을 원한다면 힘을 길러라.그는 또한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격언이 있다. 6 · 25와 같은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그리고 통일되고 번영된 조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준비된 강한 군대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단 한 평도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수많은 호국용사들이 피와 땀을 흘려 얻은 것임을."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
1950년 6월25일 아침 7시.백선엽 육군 제1사단장 장군은 서울 신당동 집에서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사단 작전참모인 김덕준 소령이었다. 백 장군은 사단장 부임 이후 전방 진지 보강공사를 서두르다 고급간부 교육명령을 받고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느라 서울에 있던 참이었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6사단과 1사단 전방을 공격했다. 1사단은 38선에 배치된 4개 사단 중 좌익 사단으로 황해도 청단,연안,배천을 거쳐 개성,고랑포,적성에 이르는 90㎞를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전차를 본 적이 없었고,대(對)전차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다.
병력의 절반가량이 외출 · 외박을 나간 일요일 새벽의 기습 공격에 병사들은 당황했다. 더구나 전차라는 새로운 무기에 병사들은 첫날부터 '전차공포증'에 시달렸고,전차라는 말만 들어도 겁에 질려 사기를 잃어버렸다.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6 · 25 전쟁의 전쟁영웅인 백선엽 장군(90)의 회고록이다. 일제강점기 나라 없는 땅에서 태어난 백 장군의 90년 삶은 파란만장하다. 만주국 장교로 복무하다 해방을 맞았고,1946년 국군 창설의 주역으로 참여했다. 6 · 25 발발 후 휴전에 이르기까지 3년1개월여 동안 사단장,군단장,참모총장의 중책을 수행하며 단 하루도 일선을 떠나지 않았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는 벼랑 끝에 몰린 조국을 구하려고 최일선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진두지휘했고,북진작전 때는 미 1군단장을 설득해 작전명령을 바꿔가며 고향인 평양에 제일 먼저 입성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자 아시아 최초의 야전군 창설 임무를 맡았고,전역한 후에는 대만 · 프랑스 · 캐나다 대사와 충주비료 사장,노근리사건 진상조사 자문위원장 등을 맡아 쉼 없이 일했다.
그는 이 책의 절반가량을 6 · 25 전쟁에 할애했다. 일요일 새벽의 기습 남침과 사흘 만의 서울 함락,군대로서의 기초도 갖춰지지 않은 군대를 이끌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던 일,북진과 평양 탈환,중공군의 개입과 눈물 어린 1 · 4후퇴,휴전회담,공비 토벌을 위한 '백(白)야전사령부' 창설,국군 최초의 대장 진급과 휴전에 이르기까지 긴박했던 전쟁 기간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낙동강 방어선에 배수진을 치고 조국의 명운을 걸었던 다부동 전투는 그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전쟁사에도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당시 병사들은 밤낮 없이 계속되는 전투에 지쳐 있었고,보급마저 끊겨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기진맥진한 상황이었다.
8월21일 아침,적이 선제공격을 가해왔다. 11연대 1대대 병력은 벌써 적군에게 쫓겨 후퇴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미8군 사령부에서는 "도대체 한국군은 싸울 의지가 있는 군대냐"며 항의전화가 걸려왔다. 즉시 지프를 몰고 11연대 전방으로 달려간 백 장군은 이렇게 병사들을 독려했다.
"내 말을 잘 들어라.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후퇴할 곳이 없다. 물러서면 바다뿐이다. 후퇴하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 미군들은 우리를 믿고 우리를 위해 싸우는데 우리가 먼저 후퇴하다니,이 무슨 꼴인가. 대한의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내가 앞장서겠으니 나를 따르라.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쏴라!"
결국 그의 부대는 다부동을 지켜냈고,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덕분에 국군은 반격의 토대를 확보했다. 그는 6 · 25 전쟁의 교훈을 이렇게 들려준다. 사전에 준비하라,진두에서 지휘하라,극한 상황 속에서도 부하의 사기를 올려라,연합작전의 중요성을 인식하라,한국 지형에 맞는 전략 · 전술을 개발하라,통일을 원한다면 힘을 길러라.그는 또한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격언이 있다. 6 · 25와 같은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그리고 통일되고 번영된 조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준비된 강한 군대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은 단 한 평도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수많은 호국용사들이 피와 땀을 흘려 얻은 것임을."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