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닷 되'는 인간에게 최소한의 먹거리잖아요. 저한테는 아프고 힘든 삶에서도 예술과 문학을 향해 꿈을 키웠던 매개체예요. 우리 민족에도 그렇고요. "

원로 소설가 한승원씨(71)가 자신의 성장기를 다룬 자전적인 장편소설 《보리 닷 되》(문학동네 펴냄)를 출간했다.

나무나 쇠로 만든 '되'는 곡물의 양을 재던 그릇인 동시에 그만큼의 분량을 가리킨다. 왜 하필 '보리 닷 되'일까. 그는 "보리 닷 되를 통해 꿈이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리 닷 되》는 작가의 고향인 전남 장흥의 갯벌과 바다를 무대로 주인공 '나(승원)'의 중 · 고교 시절을 그리고 있다. 격주에 한 번씩 80리길을 걸어 고향집에서 자취방으로 짊어지고 오는 건 '쌀 닷 되'와 '보리 닷 되'다.

쌀은 다시 팔아 보리를 사고 차액은 책을 사는 데 쓴다. 이렇게 용돈을 얻는 대신 쌀 한 톨 들어있지 않은,검누르고 왕모래알처럼 거친 보리밥을 하루 두끼 먹는다.

획일적인 군사교육(교련)에 적응하지 못해 교내 취주악대 클라리넷 연주자로 도피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보리 닷 되를 학교에 바친 덕분이다. 가난한 홀아비의 열두 살 난 딸이 겉보리 닷 되에 늙은 영감에게 팔려간 후 밤마다 '배꼽 붙이기'가 싫어 목을 매달았다는 전설의 새는 '꺼포리 타훗데(겉보리 닷 되)'라며 운다. 작가는 견디기 힘든 현실과 꿈을 향한 뜨거운 집념을 대조시키며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했다.

"늘 오금의 환부가 가려워 '혹시 나병 환자가 되는 건 아닐까'하고 걱정했던 건 실제 저의 얘기예요. 이런 면이 소년 시절을 어둡고 고독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클라리넷을 불며 밤마다 첫사랑 초영이 빌려주는 책을 읽던 생활은 곧 밝음 그 자체이지요. "

다섯 살 때 야밤 산 속에서 나무를 하다가 도깨비의 검은 그림자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일,노둣돌길에서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고니를 잡기 위해 성에가 덮인 갯벌을 치닫던 모습,사람 키높이까지 쌓인 볏단을 싣고 배를 저어가다 밤바다에서 길을 잃은 일화 등은 문인을 향한 한 소년의 독하디 독한 고집스러움을 드러낸다.

그는 "내 안의 또다른 '시꺼먼 놈'은 바로 도깨비이고 악마성이고 저항이고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녹록지 않은 경쟁의 시대,끊임없는 자가 동력을 요구받는 현대인들에게 이 소설과 작가 한승원이 던지는 화두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씨는 15년 전부터 전남 장흥 안양면 율산마을에 '해산토굴'이란 간판을 건 창작실에서 살고 있다. 20대 초반에 3년 동안 김을 양식하고 농사도 지었던 그의 언어에는 늘 비릿한 바다내음과 황토빛 흙냄새가 배어나온다.

"모든 하늘과 바다와 산과 섬,들판과 같은 자연을 얻어 주인 노릇을 하는 대신에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시와 소설 쓰기에 미치기로 도깨비와 약속을 했어요. 마치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잡힌 파우스트처럼 내 영혼을 저당잡히고 쓴 소설입니다. 살아있는 한 글을 써야 하고 그래야 재미가 나고 몸이 좋아지죠."

작가는 호흡이 짧은 요즘 독자들을 위해 재미있고 쉽게 읽도록 썼다. 하지만 꿈을 향한 젊은이의 인생 속에는 1950년대 시대 상황과 풍요로운 자연이 '의미심장한 무늬'로 알알이 박혀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