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와 미국의 느린 경기회복 여파로 상대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아시아 · 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출구전략도 늦춰지고 있다. 한국도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정책금리 인상을 권고했지만 당분간 금리 인상을 단행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부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재정적자 감축 노력을 지속키로 한 만큼 통화 쪽 출구전략은 국제적으로 늦춰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아 · 태 국가 줄줄이 금리 동결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중앙은행은 지난 3일 각각 통화정책 회의를 열어 정책금리를 동결키로 결정했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정책금리는 각각 연 6.5%와 연 4.0%다. 두 국가 중앙은행은 이로써 사상 최저 금리를 당분간 더 유지하게 됐다.

이에 앞서 호주와 태국 중앙은행도 정책금리를 동결했다. 호주 중앙은행인 RBA는 지난 1일 정책금리를 연 4.5%로 유지키로 했고 태국 중앙은행은 2일 정책금리를 연 1.25%로 유지했다.

호주는 그간 아 · 태 지역에서 금리 인상을 주도한 국가다. 호주는 중국 등 아시아국가의 경기회복세로 수출이 급증해 부동산 가격이 들썩이자 지난해 10월 G20 국가로는 처음으로 금리를 올렸다. 이후 지난달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추가로 금리를 올려 연 3.0%이던 정책금리를 연 4.5%로 높였다. RBA는 금리 동결 직후 성명서에서 "몇몇 유럽국가들의 국가 신용도에 대한 우려가 금융시장의 중심으로 등장했다"며 "이런 요인들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여러 여파를 계속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역시 인플레이션 압박에도 불구하고 유럽 재정위기에 따른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 가능성과 중국의 긴축에 따른 아시아 지역의 경기둔화 가능성을 지켜보자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재정부 "금리인상 시기상조"

한국은행이 1분기 성장률을 7.8%(전년 동기 대비 · 속보치)에서 8.1%(잠정치)로 상향조정한 지난 4일 기획재정부는 '최근 경제동향(그린북)'을 통해 "대내외 불확실성을 고려해 당분간 현재의 정책기조를 견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재정부는 특히 남유럽 재정위기와 천안함 사태를 거론하며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윤증현 재정부 장관은 5일 G20 회의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최근 남유럽 사태가 일부 나라에 출구전략 시행을 늦추게 하는 간접적인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윤 장관이 언급한 '일부 나라'에 한국이 포함돼 있다는 게 재정부 관계자들의 해석이어서 한국도 출구전략을 늦춰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정부 판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윤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G20 회의 직전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IMF 총재와 호세 앙헬 구리아 OECD 사무총장이 금리 인상을 권고한 뒤 나온 것이어서 출구전략 시점에 대해 한국 정부가 공식 입장을 밝힌 것으로도 풀이된다.

윤 장관은 4월 말부터 출구전략은 2분기 성장률을 확인한 이후 논의해 보자는 입장이었다. 2분기 성장률 속보치가 7월 말께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금리 인상 시기는 빨라도 8월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재정분야 출구전략이 먼저

출구전략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취해 온 각종 정책의 정상화를 지칭한다. 위기 극복 정책이 주로 재정과 통화 쪽에서 취해진 만큼 출구전략 역시 재정과 통화 쪽으로 구분된다.

남유럽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는 두 분야에서 나란히 출구전략을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남유럽 재정위기가 불거지면서 재정 쪽 출구전략이 우선시되고 있다.

5일 막을 내린 부산 G20 회의에서도 이를 명확히 했다. G20 회의는 성명서(코뮈니케)를 통해 "재정문제가 심각한 국가들은 재정 구조조정의 속도를 가속화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재정 구조조정이란 재정 지출을 줄이고 수입은 늘리는 것인데,이는 경기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다 금리인상이나 유동성회수 등 통화 쪽 출구전략을 함께 진행할 경우 글로벌 경제가 더블딥(경제회복 후 재차하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각국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 압박이 심해지지 않는 이상 사상 최저 금리를 꽤 오랫동안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