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심어주는 정책 나왔으면
정미경 소설가
혹자는 '상처뿐인 승리'를 거두었고 혹자는 '의미있는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니까 국민들은 오직 한 표를 통해 독선과 소통 부재에 대한 경고를 날리기도 했고 변화와 공약에 대한 지지를 목청껏 외치기도 한 것이다.
한 표의 힘이 무섭다는 걸 새삼 느꼈다. 당사자들에겐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겠지만 선거가 왜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지 실감한 하루였다. 반독재 투쟁의 구호와 최루가스 속에서 청춘을 보내야 했던 세대로서는 이 유연하고 여유 있는 과정을 지켜보는 감회가 남달랐다. 개표를 축제처럼 즐기는 분위기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격동의 시기를 지혜롭게 넘기고 지속적인 성숙을 이루어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상했던 결과이든 역전이든 당선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당선 소감과 원대한 공약과 포부들을 펼쳐놓았다. 그걸 지켜보면서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했다. 당선된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공약의 재구성'이 아닐까. 4대강 개발이나 무상급식 등의 크고 딱딱한 선거용 공약을 해체해서 사람들 사이로 온기 있게 스며들고 실현가능한 구체적 시스템으로 만드는 작업 말이다. 대의적인 공약도 개인들은 그것을 자신의 행복과 연관 지어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선거날 투표를 하고 오후엔 작업실로 나갔다. 내가 세든 층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는데 입주자들은 대부분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이다. 책상을 놓으면 겨우 한 사람이 누울 자리가 남는 공간인데도 그걸 혼자서 쓰는 사람은 나뿐이다. 친구끼리 방을 나누거나 동거하는 커플, 아이가 딸린 가족에다 강아지를 키우는 집까지 있다.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나는 그들의 일상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는 편이다. 반지하인지라 전파가 잘 통하지 않아 입주민들은 입구쪽인 내 방 앞에 와서 휴대폰 통화를 하곤 한다. 시도 때도 없다. 방음이 안되는지라 목소리는 바로 옆인 듯 선명하게 들린다. 사람들이 돌아가며 내게 인생상담이라도 하는 것 같다. 아이의 학교문제, 부부싸움, 채무에 대한 고민, 지속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어떤 인간, 어긋난 약속과 다툼. 어쩜 그렇게 암울하고 힘든 얘기들만 오가는지. 행복은 방크기 순이 아니겠지만 손바닥만한 방에서 한 가족이 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때론 격앙된 통화가 끝날 때까지 손놓고 기다려야할 때도 있지만 소설가로서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그들은 내 글 속의 등장인물이 되기도 하고 에피소드의 제공자가 되기도 한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옆방 청년은 요즘 머리가 많이 아프다. 친구와 동업한 안경가게 운영이 어려운데 친구는 자기 지분을 빼달라고 졸라대고 있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직 어린 티가 완연한 그의 어두운 안색이 영 마음에 걸린다.
젊은 층의 투표율이 과거보다 높아졌다 한다. 그만큼 그들의 삶이 불안정하고 힘들다는 이야기다. 옆방 청년은 투표를 했을까. 혹은 일찌감치 국가가 내게 무엇을 해주겠어 냉소하며 일터로 달려나갔을까. 차 한잔 나눈 적 없는 이웃이지만 이 젊은이들의 행복을 위한, 살 냄새나는 정책이 많이 나왔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