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뉴스] "노회찬 때문에 졌다"의 140년전 독일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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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노동운동이 초기부터 정당 설립의 형태로 진화한 나라다.
이처럼 독일에서 노동운동이 정치운동으로 손쉽게 바뀔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독일이 중상주의와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요약되는 계몽주의적 절대주의 전통이 강했던 만큼,국가가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는 국가중심적 문화가 강했다는 점이 주로 꼽힌다.
즉 국가를 사회적 삶의 질을 개선해 달라거나,정치적 해방요구를 받아들이는 일종의 ‘수취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독일 부르주아지들은 노동자 계급이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는데 대해 매우 소극적인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 노동정당의 출현을 방조한 측면도 있다.
당시 독일 부르주아들은 노동자 계급이 급속하게 수적으로 팽창해 정치적 해방을 맞이하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전 근대적인 프로이센 특유의 ‘3계급 선거권(Dreiklassewahlrechts)’을 폐지하고자 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애매모호한 양면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에 부르주아 명사들의 지도하에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나이브한 낙관론도 퍼져있었다.
이와 함께 독일통일 과정에서 불거졌던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의 대립, 민족주의의 부상 등이 노동자의 정치적 등장을 촉진시켰다.
1858년 새로운 황태자가 프로이센 황제로 즉위하면서 2∼3년간 비교적 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전환됐던 ‘신시대’라는 시대 분위기도 이같은 현상에 불을 붙였다.
반면 노동계급 입장에선 1840년대부터 산업화가 시작돼 1860-70년대에 이르면 소위 ‘생득적 프롤레타리아(geborenes Proletariat)’도 발생하게 되고 양적으로도 노동자수가 급팽창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됐다.
이같은 상황에 대한 독일의 저명 역사학자인 게르하르트 A. 리터의 요약에 따르면 “독일 노동자정당이 탄생하게 된 것은 허약하고 소극적인 독일 부르주아지들이 억압적 관치국가(Obrigkeitsstaat) 개혁과 독일 통일 과정에서 무능함을 드러낸 결과”가 된다.
아무튼 이런 배경하에 1863년 사회주의 노동운동가 페르디난트 라살레의 영향으로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llgemeine Deutsche Arbeiterverein)라는 ‘노동자 진보정당’이 독일내에 설립됐다.
하지만 전독일노동자협회는 ‘전독일’이라는 이름과 달리 사실상 북독일 지방에 한정된 정당이었고,주로 프로이센 지역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특히 ADAV가 반부르주아적 성향이 강했던 반면 곧이어 1865년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주도로 만들어진 사회민주당은 부르주아와 연계된 노동자 정당을 지향했다.
독일 부르주아층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 유사하게 노동계급 등 좌파도 일사분란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노동운동 및 좌파의 지역적 분열상은 한동안 지속된 것이다.
전독일노동자협회가 선보인지 6년뒤 노동운동가들은 작센 지역에 기반을 둔 좌파자유주의 정당인 작센인민당과 남독일의 노동자협회연맹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결국 실패하게 된다.
결국 1869년 아이제나흐 회의에서 하나의 광범위한 노동자계급정당으로서 사회민주노동당(Sozialdemokratische Arbeiterpartei)이 설립되게 된다.
하지만 역사학자 구스타프 마이어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의 분리”라고 불렀던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참여 움직임은 비록 1848년 혁명기에 태동되긴 했지만 1870년대까지도 확고하게 뿌리내리진 못한 상황이었다.
1870년대에도 뮌헨이나 아우구스부르크 같은 남부 독일 지역에선 사민당이 여전히 자유주의자 중심으로 노동자들을 포섭했던 민중정당(Volkspartei)과의 통합이나 제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독일에서 노동자 정당이 빨리 등장하게 된 데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리터 교수에 따르면 특히 보수적 귀족세력에 비해 ‘진보적’이었던 부르주아지들 조차 제대로 뿌리내리기 전에 노동자 정당이 등장하면서 진보세력이 분산되고 약화되는 문제점이 두드러졌다.
낙후된 정치제도를 개혁하겠다는 소위 개혁 움직임은 산산이 분산돼 흩어져 버렸고, 특히 독일 자유주의는 뿌리부터 타격을 입은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노동자 정당의 등장은 이전까지 특권적 귀족층에 맞서 전체 일반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져왔던 자유주의자들의 위상을 크게 떨어뜨려 버렸다.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적대적인 존재는 구 보수층이었음에도 직접적으로 약화된 것은 보수층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자유주의자,부르주아들이었다.
지난 6월2일 지방선거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무색하게 하는 선거 결과가 나왔다.현정부의 실정과 소통부재,일방주의적 밀어붙이기,높아지는 안보위협에 대한 국민적 견제가 이뤄진 결과라는 데 큰 이의는 없는 것 같다.
이런 와중에 일각에서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가 사퇴하지 않았기에 민주당 한명숙 후보가 낙선한 것 아니냐는 일종의 책임공방이 진보진영 온라인 상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온라인 상에서 오가는 논쟁의 요지는 (*실제 그런지는 별개로 하고) “노동자 정당을 표방하는 정치세력의 등장과 행보가 결과적으로 기존의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반(反)보수 대표세력을 약화시키는 적전분열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듯 싶다.
어찌 보면 140년전 독일에서 일어났던 현상 및 평가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역사는 때론 매우 비슷한 형태에서 별다는 차이없이 반복되곤 하는 모양이다.
<참고한 책>
Gerhard A. Ritter, Die Deutschen Parteien 1830-1914-Parteien und Gesellschaft im konstitutionellen Regierungssystem, Vandenhoeck & Ruprecht 1985
Helga Grebing, Arbeiterbewegung-Sozialer Protest und kollektive Interessenvertretung bis 1914, DTV 1987
Ursula Schulz(Hrsg.), Die Deutsche Arbeiterbewegung 1848-1919 in Augenzeugenberichten, DTV 1976
☞ 김동욱 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이처럼 독일에서 노동운동이 정치운동으로 손쉽게 바뀔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독일이 중상주의와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요약되는 계몽주의적 절대주의 전통이 강했던 만큼,국가가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는 국가중심적 문화가 강했다는 점이 주로 꼽힌다.
즉 국가를 사회적 삶의 질을 개선해 달라거나,정치적 해방요구를 받아들이는 일종의 ‘수취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독일 부르주아지들은 노동자 계급이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는데 대해 매우 소극적인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 노동정당의 출현을 방조한 측면도 있다.
당시 독일 부르주아들은 노동자 계급이 급속하게 수적으로 팽창해 정치적 해방을 맞이하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전 근대적인 프로이센 특유의 ‘3계급 선거권(Dreiklassewahlrechts)’을 폐지하고자 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애매모호한 양면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에 부르주아 명사들의 지도하에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나이브한 낙관론도 퍼져있었다.
이와 함께 독일통일 과정에서 불거졌던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의 대립, 민족주의의 부상 등이 노동자의 정치적 등장을 촉진시켰다.
1858년 새로운 황태자가 프로이센 황제로 즉위하면서 2∼3년간 비교적 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전환됐던 ‘신시대’라는 시대 분위기도 이같은 현상에 불을 붙였다.
반면 노동계급 입장에선 1840년대부터 산업화가 시작돼 1860-70년대에 이르면 소위 ‘생득적 프롤레타리아(geborenes Proletariat)’도 발생하게 되고 양적으로도 노동자수가 급팽창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됐다.
이같은 상황에 대한 독일의 저명 역사학자인 게르하르트 A. 리터의 요약에 따르면 “독일 노동자정당이 탄생하게 된 것은 허약하고 소극적인 독일 부르주아지들이 억압적 관치국가(Obrigkeitsstaat) 개혁과 독일 통일 과정에서 무능함을 드러낸 결과”가 된다.
아무튼 이런 배경하에 1863년 사회주의 노동운동가 페르디난트 라살레의 영향으로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llgemeine Deutsche Arbeiterverein)라는 ‘노동자 진보정당’이 독일내에 설립됐다.
하지만 전독일노동자협회는 ‘전독일’이라는 이름과 달리 사실상 북독일 지방에 한정된 정당이었고,주로 프로이센 지역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특히 ADAV가 반부르주아적 성향이 강했던 반면 곧이어 1865년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주도로 만들어진 사회민주당은 부르주아와 연계된 노동자 정당을 지향했다.
독일 부르주아층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 유사하게 노동계급 등 좌파도 일사분란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노동운동 및 좌파의 지역적 분열상은 한동안 지속된 것이다.
전독일노동자협회가 선보인지 6년뒤 노동운동가들은 작센 지역에 기반을 둔 좌파자유주의 정당인 작센인민당과 남독일의 노동자협회연맹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했으나 결국 실패하게 된다.
결국 1869년 아이제나흐 회의에서 하나의 광범위한 노동자계급정당으로서 사회민주노동당(Sozialdemokratische Arbeiterpartei)이 설립되게 된다.
하지만 역사학자 구스타프 마이어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의 분리”라고 불렀던 노동계급의 독자적인 정치참여 움직임은 비록 1848년 혁명기에 태동되긴 했지만 1870년대까지도 확고하게 뿌리내리진 못한 상황이었다.
1870년대에도 뮌헨이나 아우구스부르크 같은 남부 독일 지역에선 사민당이 여전히 자유주의자 중심으로 노동자들을 포섭했던 민중정당(Volkspartei)과의 통합이나 제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독일에서 노동자 정당이 빨리 등장하게 된 데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리터 교수에 따르면 특히 보수적 귀족세력에 비해 ‘진보적’이었던 부르주아지들 조차 제대로 뿌리내리기 전에 노동자 정당이 등장하면서 진보세력이 분산되고 약화되는 문제점이 두드러졌다.
낙후된 정치제도를 개혁하겠다는 소위 개혁 움직임은 산산이 분산돼 흩어져 버렸고, 특히 독일 자유주의는 뿌리부터 타격을 입은 것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노동자 정당의 등장은 이전까지 특권적 귀족층에 맞서 전체 일반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져왔던 자유주의자들의 위상을 크게 떨어뜨려 버렸다.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적대적인 존재는 구 보수층이었음에도 직접적으로 약화된 것은 보수층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던 자유주의자,부르주아들이었다.
지난 6월2일 지방선거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무색하게 하는 선거 결과가 나왔다.현정부의 실정과 소통부재,일방주의적 밀어붙이기,높아지는 안보위협에 대한 국민적 견제가 이뤄진 결과라는 데 큰 이의는 없는 것 같다.
이런 와중에 일각에서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가 사퇴하지 않았기에 민주당 한명숙 후보가 낙선한 것 아니냐는 일종의 책임공방이 진보진영 온라인 상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온라인 상에서 오가는 논쟁의 요지는 (*실제 그런지는 별개로 하고) “노동자 정당을 표방하는 정치세력의 등장과 행보가 결과적으로 기존의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반(反)보수 대표세력을 약화시키는 적전분열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듯 싶다.
어찌 보면 140년전 독일에서 일어났던 현상 및 평가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역사는 때론 매우 비슷한 형태에서 별다는 차이없이 반복되곤 하는 모양이다.
<참고한 책>
Gerhard A. Ritter, Die Deutschen Parteien 1830-1914-Parteien und Gesellschaft im konstitutionellen Regierungssystem, Vandenhoeck & Ruprecht 1985
Helga Grebing, Arbeiterbewegung-Sozialer Protest und kollektive Interessenvertretung bis 1914, DTV 1987
Ursula Schulz(Hrsg.), Die Deutsche Arbeiterbewegung 1848-1919 in Augenzeugenberichten, DTV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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