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경남 남해 (上)‥벼랑위에 가부좌 튼 108층 다랑이논 그곳엔 녹색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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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 다랭이마을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여행은 돌아오지 않으려고 떠나는 것이라고.
그렇다. 모든 여행은 돌아오지 않으려고 떠나는 것이다. 이전의 닳고 닳은 자아는 여행지에 버리고 그 대신 부쩍 커버린 자아를 안고 돌아오는 것이 여행이다.
봄과 여행은 신생이란 덕목을 지녔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도 일종의 꽃나무인지 모른다. 봄이 오면 마음의 가장자리에서도 덩달아 꽃이 핀다. 꽃 핀 마음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안달한다. 내 삶의 시원(始原)이 슬며시 궁금해질 때면 난 내 정신의 탯줄을 묻었던 영혼의 고향을 찾아 떠나고 싶어진다. 내게 경남 남해는 그런 곳이다.
마을초입 암수바위 다정히 나그네를 반기고
마침내 거대한 현수교인 남해대교가 자태를 드러낸다. 저 다리를 건너면 남해 땅이다. 남해대교를 건너 19번 국도를 따라 남해읍을 향해 들어가면 고현면 차면마을이 끝나는 곳에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인 이락사가 나타난다. 정유재란 막바지에 노량해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맨 처음 안치했던 곳이다.
차는 이내 도마 들판을 지난다. 남해에서 가장 너른 마늘밭이 있는 곳이다. 노부부가 마늘밭에서 마늘종을 뽑고 있다. 마늘종은 내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먹거리다. 어린 시절엔 배가 고파서 주전부리 삼아 뽑아 먹었고,청년 시절 이후에는 막걸리 안주로 즐겨 먹었다.
층층이 쌓인 논두렁엔 아낙네들이 마늘종 뽑느라 분주하고
이튿날 아침 일찍 남면 가천마을을 향해 떠난다. 누가 뭐래도 남해 여행의 일번지는 가천 다랭이마을이다. 다랭이마을에 닿자 가장 먼저 나그네를 반기는 것은 108층이나 되는 다랑이논이다. 108이라는 숫자는 일종의 상징이다. 나는 그 숫자에서 백팔번뇌(百八煩惱) 혹은 백팔결(百八結)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일찍이 이 나라에 농경이 시작된 이래 논이야말로 민초들의 가장 큰 백팔번뇌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식구들의 기근 여부가 전적으로 논에서 소출된 쌀의 양에 달렸던 시절이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다랑이논은 내게 이른다. 어린 시절,네가 살았던 가난은 정녕 추하고 슬픈 것만은 아니었노라고.
그때 내가 앓았던 결핍은 가족을 결속시키고 마을을 한데 묶었던 굳센 끈이었다. 저 다랑이논들은 '무릇 모든 사랑의 시원은 결핍'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준다. 가천마을 다랑이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의 흔적이다.
마을을 품은 설흘산 정상에 올라서니 쪽빛바다가 눈앞에…
문득 이손(耳孫)이란 말이 떠오른다. 얼굴은 직접 보지 못한 채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귀로만 전해 들을 수밖에 없는 까마득한 후손을 이르는 단어다. 어쩌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가난이란 이 시대의 이손인지 모른다. 핏줄을 실감하지 못하는 까마득한 후손처럼 풍요 속에서 자란 이 시대의 젊은이에게 가난은 스쳐가는 풍문이거나 한갓 공허한 관념일 뿐이다. 고샅길을 따라 마을 아래 쪽으로 내려가면 남녀의 생식기를 닮은 커다란 돌이 나그네를 맞는다. 암미륵 · 숫미륵으로 널리 알려진 바위다. 가천마을 사람들은 이 암수바위를 '미륵'이라고 부른다.
가천마을과 다랑이논을 품에 안고 있는 것은 설흘산(488m)이다. 내친 김에 설흘산을 오르기로 한다. 설흘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엔 가막살나무가 화사한 흰 꽃을 피우고 섰다. 설흘산 정상을 지키는 것은 봉수대다. 봉수대 위에 올라서자 저 멀리 눈 시리도록 푸른 앵강만과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성부 시인의 시 '피아골 다랑이논'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가슴 가득히 불덩이를 안고/피와 땀을 뒤섞이게 하는/그것이 눈물겨워 나도 고개 숙인다'
안병기 여행작가
▶안병기씨는 문인들과 함께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가끔 혼자서도 길을 떠나는 자칭 '방랑작가'다.
◇숙박과 맛집=하룻밤 묵고 싶다면 마을에서 민박을 하거나 근처에 있는 펜션을 이용하면 된다. 가천마을 붙박이 문화관광 해설사인 윤의엽씨가 운영하는 홍현리 해돋이펜션(055-862-6877)이 권할 만하다. 간단히 전복죽으로 아침식사를 할 수 있다. 가천마을 안에 있는 시골할매막걸리집에서 조막심 할머니(81)가 직접 담근 막걸리를 맛보는 것도 빼놓지 말아야 할 일이다.
◇남해의 축제=오는 20일부터 23일까지 나흘간 마늘축제가 열린다. 보물섬남해한우,마늘돼지,마늘음식·마늘가공제품 시식·판매,다양한 마늘 판매 등이 이어진다. 다음 카페 '남해군 사랑'을 방문하면 남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