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25일.선박업체 퍼스트쉽핑 대표 김모씨는 정기용선 계약서 한장을 들고 SK증권 이모씨를 찾아갔다. 이씨는 김씨가 보여준 계약서를 근거로 투자자를 모집해 360억원 규모의 선박투자펀드를 조성했다.

6개월 후,정기용선 계약서는 김씨가 SK네트웍스와의 개품운송 계약서에 있는 법인 인감을 위조해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 선박업체 대표의 위조계약서에 6개 금융사가 속아 수백억원을 날린 초유의 '선박펀드 사기사건'이 법정 다툼으로 비화됐다.

7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이 선박투자펀드로 손해를 본 삼성생명이 펀드거래 중간에서 여러 역할을 한 SK증권과 산은자산운용,하나은행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삼성생명은 SK증권 등 펀드에 관여한 금융사들이 주의의무를 위반해 일어난 사건이라며 손해 일부인 10억원을 우선 청구했다.

소장에 따르면 김씨는 2008년 3월 계약금 5%를 내고 B사로부터 1650만달러짜리 선박을 매입했다.

A사에 정기용선을 해주는 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김씨는 선박 매입 잔금을 SK증권이 조성하는 선박펀드로부터 투자받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A사가 배를 빌려쓰지 않겠다고 하자 김씨는 선박 계약금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이에 부랴부랴 새 정기용선 고객을 물색하다 고육지책으로 SK네트웍스와 개품운송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SK증권이 "개품운송 계약으로는 펀드를 조성할 수 없다"고 거부하자 김씨는 정기용선 계약서로 위조하기에 이르렀다.

김씨의 계약서를 믿은 SK증권은 계약서를 토대로 투자자들을 모았다. SK증권은 연 7.4%가량의 수익을 내는 '산은퍼스트쉽핑 사모 특별자산투자신탁 제3호 · 제4호' 펀드를 산은자산운용과 함께 조성했다. 수탁업무는 하나은행이 맡았다. 이에 따라 삼성생명은 200억원,동부생명보험과 KB생명보험이 각각 80억원을 펀드에 투자했다.

그러나 이익 분배금은 2008년 9월 3억여원이 지급된 이후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이에 의문을 가진 산은자산운용이 정기용선 계약을 했다고 계약서상에 돼있는 SK네트웍스에 확인한 결과 사실무근임을 알아냈다.

SK증권 관계자는 "이씨는 김씨에 속았을 뿐 SK증권도 피해자"라고 말했다. 산은자산운용 관계자는 "우리도 계약서를 확인하려 했지만 SK증권이 확인했다고 해서 믿었다"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펀드를 판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펀드에 참여한 다른 금융사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름있는 금융사들이 계약서 한장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벌어진 어처구니 없는 펀드 사고라는 지적이다.

이현일/임도원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