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국민 화가' 박수근 화백(1914~1965년)이 아내 김복순에게 쓴 청혼 편지의 한 구절이다. '낮춤과 삭힘의 생활 철학'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데다 스승도 없이 혼자 그림을 그리던 그는 아내의 삶을 통해 궁핍한 시대의 인간상을 깊이 있게 그려냈다. 그의 예술적 주제도 '가난과 사랑'이었다. 어려운 시절을 관통하며 미술사에 길이 남긴 그의 작품에 일하는 여인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는 7~30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에서 열리는 '박수근 45주기 기념전'은 이 같은 그의 예술정신을 한 자리에서 느껴볼 수 있다. '서민의 화가 박수근을 마주하다'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회에는 1950~1960년대 이후 소장가들에게 뿔뿔이 흩어진 그의 작품 40여점이 전시된다.

1953년 제2회 국전 특선작인 '우물가'를 비롯해 1954년 국전 입선작인 '절구질하는 여인'과'유동'(리움 소장),'골목안''나무와 여인' 등이 포함됐다. 특히 1960년 작 '목련'과 1964년 작 '아기 업은 소녀'는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그림 이외에 박수근의 다큐멘터리 영상과 사진,박수근이 자신의 후원자였던 마거릿 밀러 부인과 주고받았던 편지 사본도 전시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함께 살필 수 있다.

출품작 중 향토적인 여성을 소재로 한 대표작은 역시 1956년 작 '나무와 여인'이다. 나무를 경계로 걸어가는 여인과 아이를 업고 서 있는 여인의 대조적인 포즈가 흥미롭다. 앙상한 나뭇가지로 상징되는 가난한 시대의 삶,그 속으로 돌아가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람의 풍경이 묘한 울림을 준다.

1952년 월남한 아내와 다시 만난 박수근은 이처럼 아내와 일생을 함께하며 일상의 희로애락을 화폭에 담았다. 대부분은 아내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여인들은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거나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한국적인 여성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존재 가치를 되새기게 해주는 작품이다.

오광수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은 "나목이 자리잡고 그 아래로 두 여인이 배치된 아주 단순한 설정이지만 박수근이 다루었던 모든 여인들이 이 두 여인으로 집약되고 있다는 점에서 박수근 예술의 전형성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1961년 작 '시장 사람들'도 시장에서 물건을 팔거나 대화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황토색 짙은 미감으로 묘사한 작품. 부드러운 붓질로 서민들의 일상을 형상화했다. 또 1962년 작 '귀로'에서는 소박한 여인이 물건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화강암처럼 투박한 질감으로 그렸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일하는 여인들로 채워져 있지만 이번 전시에는 남정네를 그린 것도 나온다. 특히 1963년 작 '청소부'는 부성애를 자극하는 남자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당시 소외된 계층을 리얼하게 포착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은 "그동안 '빨래터' 위작 논란으로 실추된 박 화백의 명예를 회복하는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해 국내 근대미술의 정체성을 살리면서 새로운 시대의 미술 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며 "외국인들에게 박수근을 소개하는 영문도록(마로니에 펴냄)도 발간했다"고 말했다. 관람료 어른 5000원,학생 3000원.(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