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내년까지 20조원 가까운 돈을 반도체 공장 증설에 투자하기로 했다. 지난 3월 말 복귀한 이건희 회장이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말한 지 한 달 만에 나온 결정이다. 그의 스피드 경영이 부활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다.

삼성전자가 막대한 투자를 통해 노리는 것은 시장 점유율 확대다. 시장 점유율을 50% 가까이 끌어올려 최소 2012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반도체 산업 성장의 수혜를 독식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더 궁극적인 목적은 D램 산업의 구도를 통째로 바꿔놓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반도체 시장의 절대강자로 등극,시황에 따라 몇 년은 이익을 내고 몇 년은 손실을 보는 사이클산업의 틀을 벗어나겠다는 전략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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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규모 투자 나서나

이 회장이 반도체를 투자 1순위로 정한 것은 반도체가 삼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위상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는 "그룹 매출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70%에 이르고 이런 삼성전자의 수익을 좌우하는 것이 반도체 사업"이라고 말했다. 핵심 사업을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아야 급변하는 글로벌 IT 환경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이라는 설명이다.

이 회장 특유의 업(業)의 개념도 대규모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는 평소 "반도체 산업은 자본이 집적된 타이밍 산업"이라고 말해왔다. "1년 늦으면 수천억원의 손실을 보게 된다"고도 했다. 지금이 대규모 투자를 감행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삼성 일각에서는 지난해 시장구도를 냉정하게 평가한 게 사실이다. 지난 몇 년간 치킨게임에서 망한 회사는 키몬다밖에 없다는 것.게다가 반도체 수요가 언제 분출할지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자칫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가는 큰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전문가들은 이번 반도체 호황이 최소 2012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치킨게임 여파로 경쟁사들의 투자 여력은 아직 크지 않은 편이다. 탄탄한 자금력과 시장지배력을 갖고 있는 삼성으로선 경쟁사들을 한걸음 더 따돌릴 수 있는 기회로 볼 수 있다.

이 회장이 가장 심혈을 들여 일으켜온 산업이 반도체라는 점도 이번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반도체 사이클에서 벗어나겠다

삼성전자의 이번 투자 결정 배경에는 더 원대한 포석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투자의 궁극적 목표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을 사이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업으로 만들겠다는 목표가 숨어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시황이 나빠져도 항상 이익을 내는 구조로 만들어가겠다는 얘기다. 'CPU' 업계의 인텔과 운영체제(OS) 시장의 마이크로소프트(MS)처럼 경기 사이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면서 안정적인 이익을 낼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이 작년 말 "메모리 사업도 천수답식 경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전략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시장 지배력의 확대다. 대규모 투자를 통해 압도적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면 게임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남성 삼성전자 메모리마케팅 팀장(전무)이 연초 컨퍼런스콜에서 "D램시장 점유율을 작년 35%에서 올해 40%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말한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D램 생산량(비트단위 기준)을 작년보다 60%가량 늘릴 계획이다. 시장 전체 증가량 45~50%보다 높은 것이다.

◆장비부터 담아라

삼성전자는 반도체 장비업체들을 대상으로 이 같은 투자 계획을 설명하면서 공격적인 장비 확보에 나섰다는 후문이다. 이미 공장 뼈대가 서 있는 16라인에 들어갈 설비는 물론 조만간 땅파기 공사에 들어갈 17라인 장비까지 선취매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라인의 핵심 장비인 이머전리소그라피(노광기)가 대표적이다. 30나노급 미세회로 공정에 사용되는 이 장비는 전 세계 주문량의 절반가량이 삼성전자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머전리소그라피의 가격은 대당 1000억원에 달하는데 삼성이 발주한 물량이 27대에 이른다는 얘기다. 27개의 노광기는 월 5만장 수준의 반도체라인 5~6개를 지을 수 있는 규모다. 삼성이 어느 정도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업계는 삼성전자의 이 같은 공격적 장비발주가 계속되면 뒤늦게 다른 회사들이 투자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비업체들이 주문을 받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경쟁사들은 돈과 의지가 있어도 손발이 묶여버릴 수 있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는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로 불리는 P램 관련 투자도 대폭 확대해 반도체 시장의 판도변화를 꾀하고 있다. P램은 전기가 없어도 자료가 보존되는 플래시메모리의 특성과 D램의 빠른 처리 속도를 모두 가지고 있다.

삼성전자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상용화했고 당분간 하이닉스를 제외한 다른 업체들이 따라오기 힘든 상황이다. 하이닉스 관계자도 "삼성전자가 P램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면 메모리시장은 예상보다 더 큰 변화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