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힘들고 아픈 시간을 뚫고 봄이 온다. 슬픔에 잠기듯 통 꽃피울 생각을 않던 벚나무 가지 끝에도 붉은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봄맞이 핑계로 길을 나섰다가 천진암 근처의 찻집에 들렀다. 오래전에 멸종한 줄 알았던 고전음악 찻집이었다. 어둑하고 쓸쓸한 저녁시간이었고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선해 보이는 주인은 직접 담근 막걸리와 약초차를 내놓았다. 음악이 너무 좋아 무작정 산골짜기로 들어온 사람답게 그는 금세 DJ로 변신해 LCD를 보여주며 해설을 들려주었다. 짐작과는 달리 아주 재미있게.로마의 고대욕장에서 노래하는 전성기의 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도 좋았지만 나는 처음 보는 한 남자에게 필이 꽂혔다.

구스타보 두다멜.만화영화 주인공 같은 이름을 가진 지휘자.고전음악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낯선 이름이겠지만 공연마다 오빠부대가 몰릴 만큼 팬도 많다. 지난해 스물여덟의 나이로 LA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초청받았다니 천재라 불러도 될 것이다. 개구쟁이 악동 같은 기이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의 지휘를 보며 나는 직업근성을 못버리고 그의 캐릭터를 분석하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와 낙천적 인상은,우아하나 차가워 보이는 카라얀과는 다른 감성의 유전자를 가진 듯했다. 그는 강인해 보였고 동시에 따뜻했다. 몸 전체로 행복감을 피톤치드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거기다 날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풍요롭게 자란 사람에게선 발견하기 어려운 강렬한 야성과 카리스마까지.

그 독특한 캐릭터의 근원은 어디일까. 그는 베네수엘라의 빈민가에서 자라났다. 정부는 그 지역에 빈곤계층을 위한 음악캠프를 열었다. 술과 마약에 찌들고 넘치는 에너지를 폭력으로 발산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거리를 배회하던 아이들은 그곳에서 난생 처음 콘트라베이스와 비올라 소리를 듣는다. 일상이 된 거친 욕설과는 너무도 다른 소리.고가의 바이올린이나 오보에 같은 악기를 아이들에게 거저 빌려주었다. 그걸 빌린 아이는 깊이 고민한다. 이걸 들고나가서 팔아? 말아?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럴 순 없어.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이미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어느날 우연히 지휘봉을 집어 휘둘러보게 된다. 그 아이가 두다멜이다.

때로 인간은 손에 쥐어주는 빵 한조각보다는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지켜봐주고 인정해주기를 더 갈망한다. 숙명인줄 알았던 가난과 소외가 진정한 사랑과 배려 속에서 긍정의 에너지로 바뀐 것이다.

'엘 시스테마'라는 이 제도를 척박한 현실 속에서 꽃피운 이가 안토니오 아브레우다. 공장을 짓는 것도 아닌,어찌 보면 허황된 이 계획에 가난한 정부는 거액을 지원했다. '아이들을 음악가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고통에서 구출하는 것이 목표'라는 그의 말은 아주 겸손하게 들린다. 음악은 그 아이들과 가족들의 인성,그리고 사회를 변화시켰다. '엘 시스테마'는 이제 세계를 대상으로 그 행복감을 연주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두다멜을 볼 때면 그의 모국 베네수엘라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선거를 앞둔 요즘 선심성 공약들이 쏟아진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란 많을수록 좋겠지만 제한된 예산 때문에 의견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쪽은 완전한 무상급식을 하자 하고 다른 쪽은 제한적 급식과 더 절실한 부분으로의 투자를 외친다. 내 마음이 삐딱해서 그런지,타협을 모르는 주장들이 치밀한 표계산에 따른 것 같아 바라보는 심정이 씁쓸하다. 솔로몬의 재판에서,아이를 찢어서라도 나누겠다는 가짜 어미를 볼 때처럼.입안하는 정책이 수혜자에게 얼마만한 행복감을 줄 것인가를 진심으로 고민하는 아브레우 같은 정치가를 기다린다 하면,누군가 내게 꿈깨라고 말할까.

정미경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