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 같은 때 생선반찬들이 상에 푸짐하게 올라와도 가시 바르기가 귀찮아서 잘 먹지 않는다는 사람이 제법 있다. 그런 사람들은 으레 생선반찬의 살이 두툼한 부분만 쥐가 파먹듯이 먹고 만다. 나는 그런 장면을 보게 되면 몹시 마땅찮다. 푸른 물 속에서 자유롭게 살던 생명이 느닷없이 사람들 손에 붙들려 와서 왜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나는 집에서 밥상에 오른 생선구이의 살 발라내는 일을 담당한다. 다른 집에서는 주로 주부가 하는 일일 터이다. 신혼 때 몇 차례 생선구이의 살을 발라줬는데,그때마다 아내에게 몇 마디씩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뒤에 스스로 하도록 했는데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어느 때부터인지 아내는 상에 생선구이를 내지 않았다. 알뜰하게 먹을 자신이 없는데다 핀잔도 듣기 싫어 택한 방법이다. 그래도 나는 먹어야 하니 끼니에 생선구이를 내도록 했고,살 바르는 일을 맡았다.

세 자식들에게도 어렸을 때 생선구이를 알뜰히 먹는 법을 열심히 가르쳤다. 젓가락질을 뜻대로 할 만큼 자랐을 때는 야단을 쳐가면서 나에게 배운대로 하도록 했다. 갈치구이라면 큰 가시 하나와 작은 가시 몇 개만,굴비구이라면 머리뼈 일부와 돌 두 개만 접시에 남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생선에 젓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 못해 야단을 맞느니 아예 먹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생선을 먹이려면 잘하는 내가 나서야 했다.

내가 이처럼 치유불가한 병증 같은 습성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해의 겨울,나는 3일 동안 부대의 취사반에서 지냈다. 부대원들이 영외훈련을 받는 동안 제대 예정자인 나를 그곳에서 빈둥거리도록 배려해 준 까닭이었다. 하루는 할 일 없이 지내는 게 좋았지만 이틀째에는 참으로 따분했다. 취사장은 점심 준비로 바빴다. 나는 자청해서 국거리로 쓸 동태들을 토막치는 일을 맡았다. 통나무 도마 앞에 서서 부지런히 동태에 칼질을 해댔다. 초보에게도 쉬운 일이었고 얼마간 재미지기도 했다.

그렇게 동태 두 상자를 다 토막친 뒤,함지에 수북이 쌓인 그것들을 국솥이 있는 곳으로 옮기려는 참이었다. 이때 문득 전쟁터에서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속이 거북해졌다. 취사장 밖으로 나왔는데도 좀체 속이 가라앉지 않았다. 참으로 잔인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었다. 도대체 사람이 그것들한테 무엇을 해주었기에 맘대로 잡아다가 저런 취급을 하는가. 가축은 아예 식용을 목적으로 인간이 기른 것들이지만….

나는 그 뒤부터 1년쯤 생선을 입에 대지 못했다. 다시 먹게 되면서 될 수 있는 한 알뜰하게라도 먹어야 한다고 마음에 새겼다. 그것은 생선에 대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상문 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소설가 kpma@pap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