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탄생 100주년…다시 길을 묻다] (中) "말 꺼낼 땐 머릿속에 구체적 설계도 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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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시대를 앞서간 경영
신훈철 前사장이 본 호암
신훈철 前사장이 본 호암
"한마디로 용인술에 능한 철저한 완벽주의자입니다. "
삼성그룹 창업세대 CEO(최고경영자) 중 한 명으로 삼성전자 삼성산요 삼성항공 대표를 역임했던 신훈철 전 삼성코닝 사장(83 · 사진)은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호암)을 이렇게 평가했다. 신 전 사장은 오랜 기간 호암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던 인물로 꼽힌다. 도쿄 지점장 시절에는 비서 역할을 했고,호암이 해외 재계 · 언론계 인사들을 만날 때도 자주 배석했다.
▶호암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
"5 · 16 군사혁명 후 선대 회장이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의 전신)를 창설한 뒤 외자 도입을 위해 미국 방문길에 올랐을 때였다. 미군 연락장교로 근무했던 덕분에 통역직원으로 따라간 것이다. 호암에 대한 첫 이미지는 '자상함'이었다. "
▶호암의 '도쿄구상'에도 자주 동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방문은 주로 산업정보 수집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 기업이 어떤 사업비전을 갖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등이 주된 관심사였다. 한국비료사건 헌납 때와 같은 좌절을 겪고 울적한 심정일 때도 일본을 찾았다. 당시 일본 기업인들은 "당신 같은 드문 기업인이 그만한 일로 좌절한다면 고국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며 의욕을 북돋워주기도 했다.
▶도쿄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실제 사업에 적용된 사례가 있다면.
"삼성전자 공장 부지를 수원에 마련할 때가 생각난다. 당초 수원에 5만평 정도를 확보했는데 도쿄 산요공장을 둘러본 뒤 큰 충격을 받았다. 도쿄 산요는 35만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였다. 전자산업에 대한 인식이 확 달라져 수원 매탄동에 새로 35만평의 부지를 마련했다. 그때 이 부지를 확보하지 않았다면 수원사업장이 과연 지금 정도의 규모를 확보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나.
"선대 회장은 말수가 아주 적은 분이었다. 하지만 말을 꺼낼 때는 이미 구체적인 설계도가 머리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
▶삼성 성공의 원동력이 된 기업문화가 있다면.
"석유화학 사장 때 공장건설 과정에서 대형 사고가 났다. 완공 후 설비를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전 공정에 걸친 용접사고가 발견돼 공장을 뜯어내고 다시 시공해야 했다. 사장으로서 죽어 마땅한 엄청난 사고였다. 하지만 호암은 그 사고가 우리 책임이 아니라 금속공학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희귀한 일임을 알고 전혀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 사후 대책마련과 공장의 완벽한 복구를 독려했다. "
▶호암의 조직관리 방식은 어땠나.
"많은 경영관리요소 중에서도 특히 재무 인사와 교육을 강조했다. 현장 못지 않게 지원부서를 많이 챙겼다. 기업에 위기가 닥칠 때는 관리나 지원조직이 탄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
▶호암의 만년에 대해 듣고 싶다.
"서예를 하면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글씨에 몰두하던 선대 회장 책상 옆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쓴 화선지 7~8장이 떨어져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을 못했는데 은퇴 후 나도 서예를 해보니 알 것 같다. 그동안 이뤄낸 일들을 뿌듯한 마음으로 반추했을 것이다. "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
삼성그룹 창업세대 CEO(최고경영자) 중 한 명으로 삼성전자 삼성산요 삼성항공 대표를 역임했던 신훈철 전 삼성코닝 사장(83 · 사진)은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호암)을 이렇게 평가했다. 신 전 사장은 오랜 기간 호암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던 인물로 꼽힌다. 도쿄 지점장 시절에는 비서 역할을 했고,호암이 해외 재계 · 언론계 인사들을 만날 때도 자주 배석했다.
▶호암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
"5 · 16 군사혁명 후 선대 회장이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의 전신)를 창설한 뒤 외자 도입을 위해 미국 방문길에 올랐을 때였다. 미군 연락장교로 근무했던 덕분에 통역직원으로 따라간 것이다. 호암에 대한 첫 이미지는 '자상함'이었다. "
▶호암의 '도쿄구상'에도 자주 동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방문은 주로 산업정보 수집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 기업이 어떤 사업비전을 갖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등이 주된 관심사였다. 한국비료사건 헌납 때와 같은 좌절을 겪고 울적한 심정일 때도 일본을 찾았다. 당시 일본 기업인들은 "당신 같은 드문 기업인이 그만한 일로 좌절한다면 고국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며 의욕을 북돋워주기도 했다.
▶도쿄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실제 사업에 적용된 사례가 있다면.
"삼성전자 공장 부지를 수원에 마련할 때가 생각난다. 당초 수원에 5만평 정도를 확보했는데 도쿄 산요공장을 둘러본 뒤 큰 충격을 받았다. 도쿄 산요는 35만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였다. 전자산업에 대한 인식이 확 달라져 수원 매탄동에 새로 35만평의 부지를 마련했다. 그때 이 부지를 확보하지 않았다면 수원사업장이 과연 지금 정도의 규모를 확보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나.
"선대 회장은 말수가 아주 적은 분이었다. 하지만 말을 꺼낼 때는 이미 구체적인 설계도가 머리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
▶삼성 성공의 원동력이 된 기업문화가 있다면.
"석유화학 사장 때 공장건설 과정에서 대형 사고가 났다. 완공 후 설비를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전 공정에 걸친 용접사고가 발견돼 공장을 뜯어내고 다시 시공해야 했다. 사장으로서 죽어 마땅한 엄청난 사고였다. 하지만 호암은 그 사고가 우리 책임이 아니라 금속공학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희귀한 일임을 알고 전혀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 사후 대책마련과 공장의 완벽한 복구를 독려했다. "
▶호암의 조직관리 방식은 어땠나.
"많은 경영관리요소 중에서도 특히 재무 인사와 교육을 강조했다. 현장 못지 않게 지원부서를 많이 챙겼다. 기업에 위기가 닥칠 때는 관리나 지원조직이 탄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
▶호암의 만년에 대해 듣고 싶다.
"서예를 하면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글씨에 몰두하던 선대 회장 책상 옆에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쓴 화선지 7~8장이 떨어져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을 못했는데 은퇴 후 나도 서예를 해보니 알 것 같다. 그동안 이뤄낸 일들을 뿌듯한 마음으로 반추했을 것이다. "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