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왜 나만? 저걸 그냥! 하루에도 몇번씩 사표 써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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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에 화병까지…정신과 찾는 직장인 40%가 조울증
승진 물먹을땐 모멸감·분노에 화병
부처가 되거나 반쯤 미치거나…"아~ 화를 내시는 구나, 욕은 안하시네"
승진 물먹을땐 모멸감·분노에 화병
부처가 되거나 반쯤 미치거나…"아~ 화를 내시는 구나, 욕은 안하시네"
얼마 전 국내 굴지의 대기업 고위 임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있지만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다는 분석이 적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직장인들은 술렁였다.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라는 반응도 있었지만,대부분 직장인들은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며 공감을 나타냈다.
월급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위치까지 올라선 사람도 한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도록 만드는 게 업무 스트레스다. 고위 임원은 아니지만,김 과장과 이 대리들이 겪는 스트레스 강도도 약하진 않다. '열받아' '저걸 확' '짜증나' '때려칠까'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되뇌이는 게 김 과장과 이 대리니 말이다. 이들은 승진,상하갈등,실적 부담,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등 수십가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너희들이 팀장의 비애를 알아?
중견기업 상품기획팀에 근무하는 김승현 팀장(37)은 최근 신경정신과에서 조울증 판정을 받아 두 달째 치료를 받고 있다. 작년 초 최연소 팀장에 오른 그는 스트레스에 파묻혀 한 해를 보냈다. 고작 7명의 팀원을 거느리는 일이 군대 시절 내무반 통제보다 더 어려웠다. 윗자리에 올라보니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팀원들의 허점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마음이 유약해 일일이 잔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업무성과를 내야 한다는 중압감보다는 팀원들과의 관계 설정이 더 어려웠다. 나이가 많은 차장급 팀원은 회의 때마다 작정하고 시비를 걸었다.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말투에 화가 나 밤에는 잠도 자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김 과장은 자신을 더 세차게 몰아붙였다. 자정까지 혼자 남아 기획서를 만들었다. 집에 가서도 새벽까지 관련 책과 서류를 읽었다.
하지만 웬 걸.오래가지 못했다. 2주 정도는 생기를 찾았다가도 다시 무기력증에 빠져들었다. 팀원들과 말을 섞는 게 무서울 정도로 의기소침해졌다. 우연히 찾은 병원에서 '스트레스성 조울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김 팀장은 "신경정신과를 찾는 직장인 10명 중 3~4명이 같은 증상이라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며 "스트레스도 즐기라는 의사의 말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트레스 최대의 적은 바로 '나'
제약회사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진성희 과장(31)은 요즘 아침마다 앞머리 주변에 부쩍 늘어난 흰머리를 보며 한숨짓는 일이 많아졌다. 스트레스 탓이다. 그는 자기 자신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칭찬 콤플렉스'가 스스로를 위축시키는 원인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했다'는 얘기를 듣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다. 결과가 썩 좋지 않더라도 기를 쓰고서라도 최선을 다한 흔적은 보여야 안심이 된다.
사내에서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던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외국계 컨설팅회사 출신 영업팀장이 새로 오면서부터다. 새 팀장은 일주일간 밤을 새우다시피 해 만든 기획안을 쓱 보더니 "일주일이나 시간을 줬는데,당장 쓸 수 있는 기획안이 하나도 없네.일을 위해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게 중요해요"라고 쓴소리를 해댔다. 그는 "열심히 했다는 말을 더 이상 못 들을 것 같다는 공포가 엄습해 왔다"며 "일에 자신감을 잃게 됐다"고 털어놨다.
◆'물먹는 하마'가 될 순 없어
직장인들이 화병(火病)에 빠질 때는 뭐니뭐니해도 '물먹을 때'다. 동기들 다 승진하는데 자신만 밀렸을 때,새 프로젝트에 동료들이 대부분 참여하는데 자기만 쏙 빠졌을 때만큼 울컥하게 되는 순간은 드물다.
대기업에 다니는 오종근 과장(37)도 그런 경험을 했다. 동기들 대부분이 관리자로 승진하던 날,당연히 포함돼 있을 줄 알았던 자신의 이름이 승진자 명단에 없었다. "정말 그 충격은 말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겉으로는 연봉제를 표방했지만,호봉에 따른 정기 승진이 주로 이뤄지는 회사였기 때문에 상실감은 더 컸다. 그는 "존재를 무시당했다는 모멸감,그동안 헛살았다는 자괴감,먼저 승진한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과 상사에 대한 분노까지 섞여 한 달가량 거의 손을 놓고 지냈다"며 "하루에도 사표를 썼다가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고 말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 생각에 사표는 결국 쓰지 못했다"는 오 과장은 남들보다 한 발 늦게 승진했다. 뒤늦음을 메우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이왕 늦은 것 가늘고 길게 살자'는 유혹이 떠나지 않고 있다고 털어놨다.
◆'강한 척'하는 것도 스트레스
대기업 기획실에서 일하던 김인경 대리(30 · 여)는 야근 도중 갑자기 병원 구급차에 실려갔다. 무리하게 매일 밤 12시를 넘겨가며 야근하다가 위경련이 찾아온 것.시도 때도 없이 추진상황을 보고하라고 재촉하는 상사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한계가 겹친 게 원인이었다. 그가 병원에 실려가며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기획실에서 밀려날 텐데'였다. 체력이 약하다고 이른바 편한 부서로 발령나는 게 싫었다.
본인이 열심히 준비한 보고를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되는 것도 속상했다. 그는 병원에서 응급 처치를 받고 다음 날 오후 회사에 복귀했다. 김 대리는 "일부러라도 오버해서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여직원들의 스트레스"라고 전했다.
상사와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중견 기업에 다니는 오혁종 과장(35)은 옆에 앉은 팀장의 숨소리를 듣는 것조차 거북하다. 아랫사람들에게는 막말을 일삼으며 임원들 앞에서는 벌벌 기는 해바라기형 상사를 대면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스트레스를 이용하라
중소기업에 다니는 조인명 과장(38)의 별명은 '부처'다. 늘 '허허' 웃고 다녀서다. 조 과장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5분간 명상한다"며 "어제 한 일을 되짚어 보고 오늘 할 일을 시뮬레이션해 보면 일도 잘 풀리고,잘 안 되는 일이 있어도 차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웃음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바이오 벤처기업 비서실에서 일하는 김정윤 대리(29)는 올초부터 친구에게서 전수받은 '혼잣말 공식'으로 톡톡히 효과를 보고 있다. 그가 쓰고 있는 방법은 세 가지.'아~하는구나'와 '아~겠지','~안한 것만도 다행이야' 등이다. 직장 상사가 잔소리를 하면 '아 상사가 화를 내시는구나'하면 되고,'화를 내시는 이유가 있겠지'라고 되새긴 뒤,마지막으로 '욕을 안 하는 것만도 다행이야'라고 중얼거리며 상황을 정리해나가는 방식이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최미연 대리(30)는 함무라비 법전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행한다. '눈에는 눈,이에는 이'라는 원칙에 따라 스트레스를 준 사람에게 나름대로의 복수를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최 대리는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에 대한 험담을 퍼뜨려 당사자를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는 게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귀띔했다.
이정호/이관우/정인설/이상은/이고운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