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존스.나이는 마흔.일찌감치 지겹던 고향을 떠나 LA로 진출,죽기살기로 뛰어 광고사업자로 성공했다. 연봉 250만달러에 앞날은 창창하고 아내는 임신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아들이란 말에 농구공과 야구 글러브를 사들인 그에게 시한부 인생(신장암) 선고가 내려진다.

절망 속을 헤매던 밥은 결국 아들에게 남겨줄 내용을 비디오에 담기 시작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하는 법부터 면도하는 법까지.마지막으로 찾아간 중국인 의사로부터 마음 속 증오와 분노를 버리라는 말을 듣고 고향의 가족을 찾아가지만 갈등만 새삼 확인하고 돌아온다.

태어난 아들을 보며 자신도 실수투성이 아빠일 수 있음을 깨달은 밥은 그때야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부자는 화해한다. 고향에서 온 가족들은 마지막 선물로 밥이 옛날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서커스 공연을 마련한다. 아버지는 밥에게 말한다. "늦어도 안하는 것보단 나아."

영화 '마이 라이프'(1994)는 아들이 커서 아빠의 영상편지를 보는 걸로 끝난다. 박신양 최진실 주연 한국영화 '편지'(1997)의 설정 역시 비슷하다. 절절한 연애 끝에 결혼하지만 갑자기 뇌종양 판정을 받은 남편은 혼자 남을 아내를 위해 편지와 비디오를 장만,훗날 배달되도록 한다.

중국 베이징에 편지를 천천히 전해주는 '느림보 우체국'이 생겼다는 소식이다. 보통 우체국과 비슷하지만 도착 날짜를 보내는 사람이 정한다는 것이다. 한 달 혹은 1년, 아니면 몇 십년 뒤일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부친 것 중엔 배달일을 2046년으로 못박은 것도 있다는 보도다.

영화에서와 달리 이곳에서 부치는 편지는 주로 자기자신을 수취인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유서를 써보면 자신도 모르게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고 하거니와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몇 년 뒤 받게 될 자신을 생각하며 써나가다 보면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점검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편지를 쓰는 동안 어지럽던 마음이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삶의 무게를 덜자면 가끔씩 어깨에 짊어진 가방을 풀어서 다시 싸야 한다는 말도 있다. 필요없는 것,안쓰는 것,유효기간이 지난 것까지 잔뜩 짊어지곤 힘겹고 버거워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는 얘기다. 느림보 우체국은 없지만 언젠가 누군가에게 전해줄,혹은 스스로 늦게 읽어보게 될 편지를 써보는 것도 괜찮다 싶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