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은 한밤중에 벽을 돌 때가 없는가? 나는 성격이 편협해 태양증(太陽症)을 감당하지 못한다. "

조선시대 정조가 1798년 3월4일 노론 벽파의 거두인 심환지(1730~1802년)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이다. 그는 같은 해 8월13일자 편지에서는 이질에 걸린 어용겸(魚用謙)에게 엉뚱한 약을 처방한 자식들에 대해 "그 집 아이들은 모두 개 돼지만도 못한 물건들"이라며 독설을 내뱉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최근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공개했던 박물관 소장 정조 편지 66통을 해설과 함께 실은 《정조 임금 편지》(그라픽네트 펴냄)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정조가 외삼촌인 홍낙임(1741~1801년)에게 보낸 편지 36통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30통이 실렸다.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는 '번리어찰',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는 '삼청동어찰'로 불린다.

정조는 외삼촌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안부를 알려주거나 외가 집안의 경사에 기뻐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학문과 문장에 대한 생각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정국을 주도하고자 한 국왕의 면모를 보여줬다. 주요 인사 문제부터 세간의 풍문,주요 인물과 그 집안에 관한 정보,민심의 동태까지 국정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다뤘다.

정조는 조급하고 괄괄한 성격 탓에 국가 대소사와 책의 편집,친인척들의 소식까지 일일이 간여하고 처리했다. 또 밤새 고심하면서 업무를 다 챙기는 바람에 정력을 소진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독서였다. 정조는 "독서가 가슴의 막힘과 답답함을 사라지고 흩어지게 해준다"면서 많은 책을 읽었고,다독을 바탕으로 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정국 운영에 편지를 자주 활용했다.

이들 편지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 나오지 않는 특정 사건의 배경과 전개 과정 등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이번에 나온 책은 정조의 초서 편지를 하영휘 가회고문서연구소장이 탈초(脫草:정자체로 풀어쓰기)와 번역을 하고 주석을 단 것이다. 원문을 촬영한 이미지를 실어 편지의 체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했다. 300쪽,4만원.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