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인터뷰] 지휘자 이영칠씨 "'한번 붙어보자'며 안티 제압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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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주목받는 소피아필 지휘자 이영칠씨
"처음엔 무명의 동양인 괄시…"
"처음엔 무명의 동양인 괄시…"
"브라보! 브라보!"
지난 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불가리아를 대표하는 80년 전통의 소피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첫 내한공연을 가진 지휘자 이영칠씨(39)가 지휘봉을 내려놓자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의 표정은 한껏 상기돼 있었다. 클래식의 고향인 유럽에서는 인정받는 지휘자이지만 국내에서는 이번이 데뷔 무대였기 때문이다.
소피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종신 객원 지휘자를 비롯해 보스니아 사라예보 필하모닉 객원 상임지휘자,체코 보헤미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씨는 국내에선 낯선 얼굴이지만 유럽에서는 주목받는 인기 지휘자다. 지금까지 10여개국에서 20여개 교향악단의 지휘봉을 잡았다. 지난 7월에는 안탈 도라티,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등 세기의 마에스트로가 거쳐 간 영국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화제가 됐다.
고양아람누리(6일) 성남아트센터(8일) 서울 KBS홀(11일) 공연에 앞서 리허설에 한창인 그를 지난 5일 경기도 가평의 연습실에서 만났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리허설로 지칠만도 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감출 수 없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 내한공연은 공연 횟수(5번)에 비해 레퍼토리(12곡)가 다양하더군요.
"아직 젊기 때문에 많은 곡을 연주하려고 해요. 사실 국내에 첫 선을 보이는 무대라서 제가 특정 곡만이 아니라 많은 작품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저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이런 분들의 의심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연주로 증명하는 거죠."
▼지휘하기 전에는 호른을 연주했던데요.
"열아홉 살 때 부모님의 권유로 음악을 시작했어요. 스무 살,미국 유학을 갈 때만 해도 지휘자는 꿈도 꾸지 않았죠.뉴욕 메네스대에서 호른으로 석 · 박사를 따고 2000년에는 뉴욕 주립대에서 연주학 박사학위를 받았죠.그 뒤 상하이 오케스트라,부산시립교향악단 등 국내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 호른 연주자로도 많이 알려졌어요. "
▼왜 연주를 그만두고 지휘 공부를 위해 다시 유학을 갔습니까.
"불가리아 음악학교에 있는 친구가 저를 그리로 초대해 학교 교향악단의 지휘를 한번 맡겼는데,지휘를 해보니 음악이 다르게 들렸어요. 연주자일 때에는 음악이 하나로만 단순하게 들렸는데 지휘를 할 땐 온몸으로 느껴졌죠.마침 그곳 지휘자 선생님이 제 지휘가 마음에 들었던지 같이 공부하자고 했어요. 처음에는 '학위나 하나 더 따자'는 심정으로 지휘 공부를 했는데 제가 처음 지휘한 연주회가 확신을 줬죠.제일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을 지휘했는데 전율을 느꼈어요. 그때부터 '지휘는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죠."
▼지휘 공부를 불가리아에서 한 것이 특이해 보여요.
"현재 클래식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미국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역시 전통은 무시할 수 없더라고요. 클래식의 발상지답게 유럽은 유럽만의 저력이 있어요. 국악을 잘 몰라도 한국 사람들이 국악 장단에 쉽게 흥을 내듯이 유럽인들 역시 타고난 것이 있죠.그 중에서도 불가리아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 러시아와 독일의 중간에 있다 보니 불가리아 음악가들은 러시아,서유럽 출신 작곡가의 연주를 다 잘해요. "
▼무명의 동양인이 유럽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무술인 최배달(최영의)처럼 '그래,한판 붙어보자'는 심정으로 덤볐어요. 베오그라드 라디오 심포니의 비올리스트는 리허설 때 비웃고 나가 버렸고,모스크바 라디오 필하모닉의 연주자들은 연습을 전혀 하지 않고 저를 맞았죠.'내가 주빈 메타나 카라얀이면 당신들이 이럴 거냐'고 따졌어요.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실력으로 굴복시키는 수밖에 없었어요. 러시아에서는 차이코프스키,우크라이나에서는 프로코피에프 등 그 지역 사람들에게 익숙한 동향(同鄕) 작곡가의 곡을 일부러 지휘해 실력을 보여줬죠."
▼한국 연주자들을 협연자로 세우고 한국 곡을 많이 연주하는 이유는 뭔가요.
"그야 당연하죠.한국인이 한국 작곡가와 연주자를 소개하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 클래식 역사를 봐도 지휘자들은 대부분 자기 나라 작곡가의 곡을 연주해요. 제가 해외에서 앙코르 곡으로 아리랑을 자주 연주하고,이번 내한 공연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김윤진씨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
▼지휘자는 기본적으로 교향곡 100곡 이상을 정말 외우나요.
"그 정도 외우긴 하지만 악보의 음표 하나까지 완벽하게 기억하지는 않아요. 연주할 때 디테일을 잡기 위해서는 악보가 필요하죠.악보를 많이 외운다고 연주를 잘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꼼꼼히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
▼지휘자는 절대음감의 소유자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절대음감이 있으면 절대 지휘를 못 해요. 절대음감은 도,레,미를 정확히 안다는 것인데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면 열을 받아서 음정이 올라가기 때문에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은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헷갈리게 되죠.지휘자는 음을 절대적으로만 느끼지 않고 시야가 넓게 잡음을 포함해 모든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해요. "
▼80개가 넘는 모든 악기 소리를 구분해서 다 들을 수 있나요.
"연주자의 숨소리까지 들려요. 그래서 연주단원들이 소곤거리지도 못하게 하죠.다 들려서 지휘하는 데 방해가 되니까요. 처음부터 모든 악기의 소리가 들리진 않았죠.그러나 관심이 있으면 되는 것 같아요. "
▼베를린 필하모닉,빈 필하모닉 등 세계 최고로 꼽히는 오케스트라들은 다른 교향악단과 어떻게 다른가요.
"사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교향악단은 실력이 다 비슷해요. 기본적으로 테크닉을 갖추고 있어서 어떤 곡이든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죠.다만 지휘자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색깔이 달라질 뿐이에요.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의 실력이 비슷하지만 감독에 따라 팀 특성이 다른 것처럼 말이죠."
▼클래식 매니지먼트사 EU메노뮤직의 운영에도 참여한다면서요.
"클래식계도 매니지먼트가 지배하는 세상이에요.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매니지먼트사를 통해 알려지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 주지 않죠.미국,유럽 등의 음악 유학생 30~40% 정도가 한국인이고 세계 유수 콩쿠르를 한국인이 휩쓸고 있잖아요. 그만큼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 많은데도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되지 않아 실력만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 너무 아쉬워요. "
▼지휘자는 지휘만 잘 하면 되나요.
"지휘자는 음악가이면서도 사업가,정치가여야 해요. 오케스트라를 먹여 살리는 것이 지휘자의 역할이죠.카라얀이 마에스트로로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도 2차 대전 후 베를린 필하모닉을 살려냈기 때문이에요. 전후의 힘든 상황에서도 카라얀은 음반을 내고 연주회를 하면서 단원들을 잘 살게 해줬죠."
▼협연하는 솔로 연주자들도 지휘자들이 살리는 것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지휘자 덕에 유명세를 타죠.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도 지휘자 로린 마젤이 협연자로 많이 세워서 컸어요. 연주자가 솔리스트로 알려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것이죠.지휘자의 선택 없이는 연주자가 유명해지기 어려워요. "
▼앞으로 계획은 뭡니까.
"내년 일본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를 포함해 1년 내내 스케줄이 빡빡해요. 궁극적으로는 후배들이 편히 갈 수 있게 '길'을 만들 겁니다. 제가 해외에서 더 인정받아서 우리나라 연주자들이 덕을 봤으면 해요. "
글=김주완/사진=강은구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