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품 이하의 집은 오채(五彩)로 꾸밀 수 없고,담장은 8척을 넘지 못한다. 오두품 집의 담장은 7척,사두품 이하 일반백성은 6척을 넘지 못한다. 석회(石灰)는 진골도 사용할 수 없다. ' '삼국사기 옥사조(三國史記 屋舍條)'에 기록된 신라의 가옥과 담장 높이에 대한 조항이다.

일찌감치 담장 높이로 신분을 갈랐던 셈이다. 그렇긴 해도 우리 전통가옥의 담은 높지 않았다. 육두품이라야 240㎝ 정도요,일반 백성의 집은 180㎝ 이하니 사람 키를 크게 넘지 않았던 셈이다. 싸리나무 울타리나 흙담의 경우 까치발을 하면 마당에 누가 있는지 보일 정도였다.

속이 들여다 보이는 울이건,좀더 튼튼하고 가로막힌 담이건 이웃과의 소통이나 왕래를 완전히 단절시키진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게 언제부터인가 담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관공서는 물론 집집마다 담을 높였다. 뿐이랴.튼튼하게 쌓은 담 위에 철망을 두르고 깨진 유리병 조각도 꽂았다.

높아지기만 하던 담장이 낮아지기 시작한 건 1996년.대구를 시작으로 서울과 인천 등에서 관공서와 학교의 담장을 허물고 녹지공간을 만들기 시작한 게 시초였다. 높다란 담장이 사라지자 건물이 보이게 된 건 물론 그 자리에 자연석과 나무로 꾸며진 화단이 조성돼 한결 편안하고 아름다운 거리가 생겨났다.

서울의 경우 더 나아가 2004년부터 실시한 그린파킹(Green Parking) 사업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린파킹 사업이란 담장을 헐어 주차시설을 확보하고 보다 널찍한 생활도로를 만드는 것이다. 다세대주택이 밀집된 곳의 경우 담장을 없애자 주차난이 완화된 건 물론 통행도 한결 편안해졌다고 한다. 걱정과 달리 범죄도 줄었다는 발표다.

담은 소통과 왕래를 막고 그 결과 침입과 붕괴의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벽돌과 시멘트 담만 그러하랴.마음 속의 담도 마찬가지다. '담-나와 당신을 위한 이야기'(글로리아 J.에반즈)의 주인공처럼 우리 모두 어쩌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 속에 높고 두터운 담을 쌓는지 모른다.

그러나 담 안에 갇히면 외롭고,외로우면 불안하고,불안하면 두렵고,두려우면 누구를 향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맹목적 증오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두려움과 증오에서 벗어나자면 먼저 마음 속의 담부터 허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소통은 불가능하고 소통하지 못하면 행복도 발전도 없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