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본에는 이건희 같은 경영자가 없는가. " 2005년 12월 일본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전자업계의 위기'라는 기사에서 이런 화두(話頭)를 던졌다. 2004년 삼성전자 한 회사가 세계 최고의 기술로 무장한 일본 7대 전자업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올린 데 따른 위기감의 표출이었다.

일본 기업들은 지금도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경영의 신'으로 부른다. 자신들이 실컷 우려먹다가 버리다시피 한 반도체 등 전자산업의 저급 기술을 건네받아 부품과 세트 전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일궈낸 역량에 대한 추앙이다. 이 전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열정과 냉철한 판단력이 없었더라면 삼성의 비약적인 발전은 불가능했다는 게 국내외 경영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신경영으로 대대적 경영수술

1993년 가을,한 방송을 통해 이 전 회장이 신경영을 주창하는 모습이 전국에 방영됐다. 화면에는 한 쪽 손에 담배를 든 채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 전 회장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내가 1979년부터 불량은 안 된다고 소리소리 질렀고 회장 취임하고 5년이 지나서도 불량은 안 된다,양이 아니라 질로 가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도 양을 외치고 있어.비서실장,삼성전자 사장,전자 본부장 모두 양이 중요하다고 그래.이거 모두 썩어빠진 정신이야.암을 번지게 하는 거라고."

그 유명한 삼성 '질(質)경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켐핀스키 호텔에서 이 전 회장의 불호령을 듣고 있던 유럽 주재원들은 당혹감에 좌불안석이었다. 질타는 이어졌다. "(내가) 후계자가 되고부터 모든 제품의 불량은 암이라고,암적 존재라고 말해왔어.암은 스스로 자라나. 초기에 자르지 않으면 죽게 돼 있다고.삼성전자는 암이 만성기에 돌입할 수 있어.정신들 차려."

1992년 세계 1위에 오른 D램을 제외하고는 삼성전자 대부분의 제품이 해외에서 싸구려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삼성 사장단은 처음에 이 전 회장의 '질 경영'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단 제품을 많이 팔아 점유율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은 최고의 품질,세계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스스로 전율하고 있었다.


"수원단지(가전공장) 안에 40만평이 꽉 차 있어.3만4000명인가 꽉 들어차 있다고.이놈의 집단에서 겨우 400억원,500억원 하고 있다 이 얘기야.그 옆에 단지(반도체단지)는 실제 10만평도 안돼.여기 1만명이 안 되는 곳에서 이익이 5000억원 나. 잘나면 8000억원 나고…."

세계 일류에 대한 이 전 회장의 집념은 무서울 정도였다. 임직원들을 상대로 한 수백시간의 강연과 대화에도 별 효과가 없다는 판단이 들자 마침내 승부수를 던졌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는 슬로건의 경영혁신이었다. "나부터 변해야 해.남 탓하지 말고.내가 바뀌면 마누라가 바뀌고,마누라가 바뀌면 자식이 바뀌고 그러면 삼성이 바뀔 수 있어.왜 못해."

◆번뜩이는 통찰력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 첫 고비를 맞은 것은 4메가D램 개발을 앞두고 있던 1987년.트랜지스터의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 회로를 고층으로 쌓을 것인가,아니면 회로를 파고들어갈 것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쌓는 것은 스택 방식이라고 하고 파들어가는 것은 트렌치 방식이라고 한다. 이 전 회장은 주저하지 않았다. 스택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화하려고 한다. 두 기술을 단순화해 보니 위로 쌓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대성공이었다. 당시 트렌치를 택한 도시바는 D램 선두자리를 내놓게 된다.

1993년에는 반도체 5라인을 깔면서 두 번째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세계 표준은 6인치 웨이퍼였다. 삼성은 8인치를 택했다. 이 전 회장은 "남들이 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따라가다가는 경제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한다. 월반하지 않으면 기술 후진국에 머물게 된다"고 말했다.

최근 전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 삼성전자 TV사업의 성공에도 이 전 회장의 과감한 발상과 추진력이 녹아 있다. 이 전 회장은 "아날로그 방식에서는 우리가 졌다. 출발이 늦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디지털로 바뀌고 있다. 출발선이 같다. 우리도 1등을 할 수 있다"며 독려했다. 그렇게 해서 구성한 것이 'TV 일류화사업 추진위원회'였다. 윤부근 사장은 "당시 소니 TV가 100원에 팔리고 있었다면 우리 제품은 68원에 팔릴 때였다. 엔지니어들에게 소니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사장부터 직원들까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원회가 발족한 이후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300여명의 반도체 담당 엔지니어들이 TV 부문으로 한꺼번에 옮긴 것.반도체 연구원 한 명만 옮겨도 담당 사장의 별도 결재가 필요하던 시절에 가히 혁명적인 조치였다. 삼성종합기술원에서도 50명의 연구원이 넘어왔다. 결국 삼성은 인간의 뇌처럼 TV의 모든 성능을 조절할 수 있는 자체 크리스털엔진 칩 개발에 성공,디지털 TV 시대의 주역으로 발돋움했다.

이 전 회장은 또 TV를 일류로 만들기 위해 집중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2002년 사장단 회의에서 이런 지시를 내렸다. "삼성전관(현 삼성SDI)은 LCD사업을 삼성전자로 이관하세요. LCD사업은 프런티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전관은 농업적 근면성은 있으나 창의적인 사업을 할 수 있는 문화가 없습니다. LCD는 반도체 공정과 흡사하기 때문에 단순히 디스플레이라고 해서 삼성전관에 맡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대규모 투자가 수반되는데 삼성전관은 투자 여력도 없어 보입니다. "

얼핏 매몰찬 것처럼 보이지만 빈틈없는 판단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전자의 LCD사업은 반도체사업과 유기적인 시너지를 창출하며 7년째 세계 1위를 달리고 있고,삼성SDI는 2차전지 사업에서 새로운 블루오션을 개척하고 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