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부터 10년 넘게 서울 세검정 단독주택에 살았다. 고유가로 인한 난방비 부담에 맞벌이의 여유를 빼앗기고 방범 때문에 불안해 하기도 했다. 강남 8학군으로 옮겨가라는 권유도 받았고 강북 단독주택이 강남 아파트에 비해 재산 증식상 크게 불리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도심에서 가깝고 공기 좋은 세검정 집을 떠나게 만들진 않았다. 마음을 바꾼 건 예기치 못한 데서 비롯됐다.

집집마다 자가용이 늘어나 골목 주차가 힘들어지면서 이웃 간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것이다. 정원을 줄여 집 안에 주차장을 만들었는데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대문 앞에 차를 세워두는 사람들로 인해 차가 드나들기 힘들었다. 결국 주차장이 넉넉한 곳으로 이사가기로 결심하게 됐다.

경기 일원에 조성된 신도시 아파트들은 정부 정책에 따라 넉넉한 주차공간을 확보했다. 덕택에 일산으로 이사한 뒤 주차 시름에서 벗어났다. 서울의 아파트도 1990년대 중반 이후 지어진 곳들은 주차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그러나 법정 의무 주차 대수를 억지로 채우려다 보니 그런 건지 금만 그어졌지 실제 주차하기엔 턱없이 좁은 구역도 많다.

사회의 큰 틀이나 흐름을 바꾸는 데 정부 역할에 비교될 만한 힘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인지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의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자리마다 대부분의 결론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예산부터 제도적 지원까지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무궁무진하다는 인식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한편에선 정부보다 시장이 자원 배분에 훨씬 효율적이며 따라서 지나친 개입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져 왔다. 지난해 촉발된 세계 경제위기는 한동안 새 트렌드로 자리잡아 온 규제 완화와 작은 정부란 흐름에 일격을 가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당연시되고 경기부양책이 동원되는가 하면 금융권에 대한 감독 강화 필요성이 강조됐다.

시장주의자나 정부 개입주의자나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정책을 주장하진 않지만 적정선에 대한 입장은 크게 다르다. 국제 금융회사 간 거래 시 상대방에 대한 신용조사를 거치게 되는데,개별 금융업체의 재무상태뿐만 아니라 해당 금융업체가 어떤 감독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도 중요한 점검 사항 중 하나다.

그렇다 해도 금융감독을 '잘한다'와 '많이 한다'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니다. 차선처럼 굵은 실선을 그어야 할 일과 원용이 가능한 점선으로 처리해야 할 일의 차이와 타이밍을 잘 맞추는 판단이 양질의 감독을 가능케 할 것이다. 조세제도도 선진형일수록 단순하고 후진형일수록 복잡하다고 한다. 금융감독을 비롯한 정부의 역할은 방향이나 인프라 등의 굵은 실선을 그리는 데 적합하고,세세한 움직임은 시장이 수시로 변하면서 그리는 점선에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이란 생각이다.

김선구 카디프생명보험 부사장 sunkoo2000@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