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뉴스] 하체는 20대, 얼굴은 60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오늘날 남아있는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300점이 넘는다고 한다. 아마도 루이 14세 생존 당시 실제 그려진 작품은 700점이 넘을 것이라는 게 역사학자들의 추론. 특히 루이14세의 초상화는 왕의 생존 당시 정치선전의 소재로 적극 활용됐다. 베르사이유 궁전과 함께 이때 전파된 왕의 메시지는 전 유럽에 걸쳐 프랑스혁명기까지 두고 두고 남는 구체제 절대왕정의 이미지로 각인됐다.
이에 따라 왕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크고 화려하게 그려졌고, 초상화가 걸리는 위치도 정교하게 계산됐다. 감상자가 언제나 왕을 우러러 볼 수 있도록 왕의 눈높이는 언제나 감상자의 시선보다 높게 맞춰졌다는 게 (약간은 장황하지만 무척 재미있는) 루이14세 전기를 쓴 이영림 교수의 설명이다. (언제나 베르사이유에서 복잡한 에티켓의 홍수속에서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했고, 귀족들의 동태 하나하나를 끊임없이 감시했던 루이14세는 초상화 마저도 정말로 외모뿐 아니라 이면까지 본인을 완전히 빼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루이 14세는 평상복 차림으로 초상화에 등장하는 적이 없다고 한다. 언제나 로마 전사처럼 갑옷을 입은 모습이던가, 군주의 화려하고 장엄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유명한 작품이 1701년 야생트 리고가 완성한 루이14세의 초상화로 이 작품은 지금까지 루이 14세의 공식 초상화로 지정돼 루브르 박물관의 한켠을 장식하고 있다고 한다. 이 초상화속에서 루이 14세는 힌담비 털로 안을 댄 황금빛 백합꽃 무늬가 가득한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다.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칼과 황금 왕관 등도 태양왕의 절대권위에 어울리게 화려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그림은 아주 특이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그림에 묘사된 왕의 모습이 생물학적인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림의 상체는 60대 ‘할배’의 신체 특징을 지니고 있는 반면 하체는 20대의 건장한 청년의 다리가 그려진 것이다. 한마디로 상체는 가발을 썼다고 해도 가볍게 늘어진 볼을 통해 영락없는 63세 할아버지의 모습을 전하는 반면, 다리는 몸에 꼭 맞는 비단 바지를 입고 이제 막 춤을 추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 모습이 20대의 탱탱하고 건장한 다리가 분명하다.
젊고 영웅적인 왕과, 늙고 준엄한 왕이 한 그림에 한 몸을 이뤄 공존하는 것은 단순히 화가의 실력미숙에 따라 ‘아수라 백작’이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 몸과 늙은 몸이 합체된 이 괴물같은 왕의 형상은 살아있는 왕은 언젠가 소멸하게 될 육체를 지닌 인간적인 존재지만, 왕국을 지배하는 최고 주권자로서 왕은 초시간적인 영원불멸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국왕이체론은 중세말 이후 프랑스 군주정을 지탱해온 정치신학으로 초상화란 은유를 통해 영원불멸성을 재현한 셈이다.
하지만 이같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이데올로기, 전 국가적인 선전사업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으로 루이14세는 한사람의 병약한 인간일 따름이었다. 루이14세는 엄청난 대식가에 기골이 장대한데다, 평균수명이 20대이던 당시에는 드물게 77세까지 장수한 인물이지만, 또한 한편으론 온갖 병을 달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명의 시의들이 작성한 ‘건강일지’를 통해 의학사의 귀중한 샘플로도 남은 일종의 마루타이기도 하다. 1647년 14세에 천연두를 앓았고 1658년 성홍열, 1663년에는 홍역을 앓으며 죽음의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고 한다. 그는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얼굴에 곰보자국이 생겼고, 성홍열을 앓고 난 다음에는 머리가 빠져 거의 대머리가 됐다. (그때부터 평생 가발에 집착했다.) 또 피부병과 위염,설사 등 가벼운 질병을 달고 살았고 평생 편두통과 치통, 통풍, 신장결석, 당뇨 등 만성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복잡한 의례와 함께한 왕의 식사는 하나의 정치행위였고, 루이14세는 하루 세끼마다 코스별로 10종류의 요리가 나오는 식사를 아침 3코스, 저녁 5코스를 매일 소화했다. 이와 함께 침실과 마차 안에 과자류나 초콜릿 등이 수북이 쌓여 왕은 늘 사탕을 입에 물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처럼 대책 없이 먹어대다 보니 왕은 수시로 위염을 앓고 설사를 되풀이했고, 여기서 두통과 현기증, 심장부담, 의기소침함 등이 파생됐다. 시의들은 당시 처방대로 사혈요법이나 관장요법을 반복적으로 시행했고, 때론 왕의 숙면을 위해 약간의 아편을 처방하기도 했다.(의사들의 처방이 그다지 도움이 됐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시의들이 행한 관장과 사혈은 왕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단것을 입에 달고 산 까닭에 치아문제가 심각했다. 루이14세는 10대부터 잇몸에 염증이 생기고, 30대에는 턱 치아 전체가 썩었다. 결국 1685년에는 위턱의 치아 하나만 남긴 채 이를 전부 뽑아냈고, 치아가 없어진 상태에서 왕의 음식은 모두 유동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1685년 받은 수술이 잘못되면서 루이14세의 입천장에 구멍이 나 버렸다. 그래서 액체를 마시면 분수처럼 그 일부가 코로 흘러들어 갔고, 잇몸에 염증이 생겨 혈농이 흘렀고 왕 주변에 가면 악취가 진동했다.
결국 루이 14세는 1685년 1월10일 이 구멍을 막기 위해 잇몸을 14번이나 뜨거운 쇠로 지지는 대수술을 받았고, 이후 이 수술은 세차례나 계속됐다고 한다.
왕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위쪽 문제가 해결되나 싶으니 아래쪽에서 문제가 터졌다. 잇몸수술 1년여 후인 1686년 왕은 항문 근처에 종기가 발견됐고 곧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커졌다. 결국 1월20일부터 왕은 수차례 종기를 짜내고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수술을 받았다. 2월 21일에는 오른쪽 발에서 통풍이 도졌고 23일에는 항문의 종기가 종양으로 발전해 장기로 번지는 치루가 됐다. 이때부턴 10월까지 키니네와 독주, 하제 등 온갖 치료법이 총동원됐고 이에 따라 왕의 몸도 지쳐갔다.
결국 11월 18일 루이14세는 치루 수술을 받았는데 소독제도 마취제도 없이 무자비하게 수술이 진행됐다. 역사 기록은 “왕이 꿋꿋하게 버티며 수술 중 단 한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개인적으로 그다지 믿음이 가는 기록은 아니다.
이후에도 왕은 통풍이 계속됐고, 두통도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괴로운 수술 후유증으로 우울증과 류머티즘에도 시달렸다고 한다.
이같은 육체적 고통이 대단해서 '만사가 귀찮아진' 왕이 낭트칙령 폐지 등 주요 사안을 대충대충 처리해 버렸다는 역사적 해석도 나온다.
결국 루이14세는 1701년 통풍이 악화돼 휠체어에 의존하게 됐고, 젊은 시절 한가닥하던 화려한 춤꾼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결국 1715년 사망할 때까지 골골거리며 각종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제부 내근을 한지 어느덧 6개월이 넘어섰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보는 시간이 많다보니 절로 커피와 과자 등에 손이 가는 경우가 많아진다. 워낙 게으른 탓에 운동도 잘 안하다 보니 살도 조금 불어난 듯 싶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많아도 무너진 건강 앞에는 장사가 없는데 돈도 권력도 없는 범부가 몸만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살짝 든다. 가진 것 없이 몸만 루이14세처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없진 않다. 내일부턴 퇴근 후에 집에서 자전거라도 계속 타야할 텐데. 벌써부터 의지가 약해지는 소리도 들린다.-_-
<참고한 책>
이영림, 루이14세는 없다, 푸른역사 2009
Stephen J. Tonsor, 'Equality as a Factor in American and French Revolutions', in Stephen J. Tonsor(Edited), Reflections on the French Revolution. Regnery Gateway 1990
Colin Jones,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Fr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Munro Price, The Fall of the French Monarchy, Macmillan 2002
☞김동욱 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이에 따라 왕의 초상화는 실물보다 크고 화려하게 그려졌고, 초상화가 걸리는 위치도 정교하게 계산됐다. 감상자가 언제나 왕을 우러러 볼 수 있도록 왕의 눈높이는 언제나 감상자의 시선보다 높게 맞춰졌다는 게 (약간은 장황하지만 무척 재미있는) 루이14세 전기를 쓴 이영림 교수의 설명이다. (언제나 베르사이유에서 복잡한 에티켓의 홍수속에서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정치 행위를 했고, 귀족들의 동태 하나하나를 끊임없이 감시했던 루이14세는 초상화 마저도 정말로 외모뿐 아니라 이면까지 본인을 완전히 빼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루이 14세는 평상복 차림으로 초상화에 등장하는 적이 없다고 한다. 언제나 로마 전사처럼 갑옷을 입은 모습이던가, 군주의 화려하고 장엄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유명한 작품이 1701년 야생트 리고가 완성한 루이14세의 초상화로 이 작품은 지금까지 루이 14세의 공식 초상화로 지정돼 루브르 박물관의 한켠을 장식하고 있다고 한다. 이 초상화속에서 루이 14세는 힌담비 털로 안을 댄 황금빛 백합꽃 무늬가 가득한 푸른 망토를 걸치고 있다.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칼과 황금 왕관 등도 태양왕의 절대권위에 어울리게 화려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그림은 아주 특이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그림에 묘사된 왕의 모습이 생물학적인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림의 상체는 60대 ‘할배’의 신체 특징을 지니고 있는 반면 하체는 20대의 건장한 청년의 다리가 그려진 것이다. 한마디로 상체는 가발을 썼다고 해도 가볍게 늘어진 볼을 통해 영락없는 63세 할아버지의 모습을 전하는 반면, 다리는 몸에 꼭 맞는 비단 바지를 입고 이제 막 춤을 추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 모습이 20대의 탱탱하고 건장한 다리가 분명하다.
젊고 영웅적인 왕과, 늙고 준엄한 왕이 한 그림에 한 몸을 이뤄 공존하는 것은 단순히 화가의 실력미숙에 따라 ‘아수라 백작’이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 몸과 늙은 몸이 합체된 이 괴물같은 왕의 형상은 살아있는 왕은 언젠가 소멸하게 될 육체를 지닌 인간적인 존재지만, 왕국을 지배하는 최고 주권자로서 왕은 초시간적인 영원불멸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국왕이체론은 중세말 이후 프랑스 군주정을 지탱해온 정치신학으로 초상화란 은유를 통해 영원불멸성을 재현한 셈이다.
하지만 이같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이데올로기, 전 국가적인 선전사업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으로 루이14세는 한사람의 병약한 인간일 따름이었다. 루이14세는 엄청난 대식가에 기골이 장대한데다, 평균수명이 20대이던 당시에는 드물게 77세까지 장수한 인물이지만, 또한 한편으론 온갖 병을 달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명의 시의들이 작성한 ‘건강일지’를 통해 의학사의 귀중한 샘플로도 남은 일종의 마루타이기도 하다. 1647년 14세에 천연두를 앓았고 1658년 성홍열, 1663년에는 홍역을 앓으며 죽음의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고 한다. 그는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얼굴에 곰보자국이 생겼고, 성홍열을 앓고 난 다음에는 머리가 빠져 거의 대머리가 됐다. (그때부터 평생 가발에 집착했다.) 또 피부병과 위염,설사 등 가벼운 질병을 달고 살았고 평생 편두통과 치통, 통풍, 신장결석, 당뇨 등 만성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복잡한 의례와 함께한 왕의 식사는 하나의 정치행위였고, 루이14세는 하루 세끼마다 코스별로 10종류의 요리가 나오는 식사를 아침 3코스, 저녁 5코스를 매일 소화했다. 이와 함께 침실과 마차 안에 과자류나 초콜릿 등이 수북이 쌓여 왕은 늘 사탕을 입에 물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처럼 대책 없이 먹어대다 보니 왕은 수시로 위염을 앓고 설사를 되풀이했고, 여기서 두통과 현기증, 심장부담, 의기소침함 등이 파생됐다. 시의들은 당시 처방대로 사혈요법이나 관장요법을 반복적으로 시행했고, 때론 왕의 숙면을 위해 약간의 아편을 처방하기도 했다.(의사들의 처방이 그다지 도움이 됐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시의들이 행한 관장과 사혈은 왕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단것을 입에 달고 산 까닭에 치아문제가 심각했다. 루이14세는 10대부터 잇몸에 염증이 생기고, 30대에는 턱 치아 전체가 썩었다. 결국 1685년에는 위턱의 치아 하나만 남긴 채 이를 전부 뽑아냈고, 치아가 없어진 상태에서 왕의 음식은 모두 유동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1685년 받은 수술이 잘못되면서 루이14세의 입천장에 구멍이 나 버렸다. 그래서 액체를 마시면 분수처럼 그 일부가 코로 흘러들어 갔고, 잇몸에 염증이 생겨 혈농이 흘렀고 왕 주변에 가면 악취가 진동했다.
결국 루이 14세는 1685년 1월10일 이 구멍을 막기 위해 잇몸을 14번이나 뜨거운 쇠로 지지는 대수술을 받았고, 이후 이 수술은 세차례나 계속됐다고 한다.
왕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위쪽 문제가 해결되나 싶으니 아래쪽에서 문제가 터졌다. 잇몸수술 1년여 후인 1686년 왕은 항문 근처에 종기가 발견됐고 곧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커졌다. 결국 1월20일부터 왕은 수차례 종기를 짜내고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수술을 받았다. 2월 21일에는 오른쪽 발에서 통풍이 도졌고 23일에는 항문의 종기가 종양으로 발전해 장기로 번지는 치루가 됐다. 이때부턴 10월까지 키니네와 독주, 하제 등 온갖 치료법이 총동원됐고 이에 따라 왕의 몸도 지쳐갔다.
결국 11월 18일 루이14세는 치루 수술을 받았는데 소독제도 마취제도 없이 무자비하게 수술이 진행됐다. 역사 기록은 “왕이 꿋꿋하게 버티며 수술 중 단 한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개인적으로 그다지 믿음이 가는 기록은 아니다.
이후에도 왕은 통풍이 계속됐고, 두통도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괴로운 수술 후유증으로 우울증과 류머티즘에도 시달렸다고 한다.
이같은 육체적 고통이 대단해서 '만사가 귀찮아진' 왕이 낭트칙령 폐지 등 주요 사안을 대충대충 처리해 버렸다는 역사적 해석도 나온다.
결국 루이14세는 1701년 통풍이 악화돼 휠체어에 의존하게 됐고, 젊은 시절 한가닥하던 화려한 춤꾼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결국 1715년 사망할 때까지 골골거리며 각종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제부 내근을 한지 어느덧 6개월이 넘어섰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보는 시간이 많다보니 절로 커피와 과자 등에 손이 가는 경우가 많아진다. 워낙 게으른 탓에 운동도 잘 안하다 보니 살도 조금 불어난 듯 싶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력이 많아도 무너진 건강 앞에는 장사가 없는데 돈도 권력도 없는 범부가 몸만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살짝 든다. 가진 것 없이 몸만 루이14세처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없진 않다. 내일부턴 퇴근 후에 집에서 자전거라도 계속 타야할 텐데. 벌써부터 의지가 약해지는 소리도 들린다.-_-
<참고한 책>
이영림, 루이14세는 없다, 푸른역사 2009
Stephen J. Tonsor, 'Equality as a Factor in American and French Revolutions', in Stephen J. Tonsor(Edited), Reflections on the French Revolution. Regnery Gateway 1990
Colin Jones,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Fr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Munro Price, The Fall of the French Monarchy, Macmillan 2002
☞김동욱 기자 블로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