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 600만명 시대] "제 때 돈 갚는 사람이 바보"… 대출받고 곧바로 파산 신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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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빚 안갚는 사회
"빚 안 갚을 방법 있다"…농촌마을 사람 모아놓고 브로커들 파산신청 유혹
"빚 안 갚을 방법 있다"…농촌마을 사람 모아놓고 브로커들 파산신청 유혹
#사례1.전남 완도의 단위농협 6곳(약산,금일,완도,신지,군외,고금)은 2005년부터 올해 4월까지 4년여에 걸쳐 한 곳으로 통합됐다. 대출을 받은 조합원들이 무더기로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부실조합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해당 농협 중에는 조합원의 93%가 파산신청한 경우도 있었다. 농협 관계자는 "변호사와 법무사들이 농촌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빚을 안 갚게 해주겠다'며 집단적으로 파산신청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설명했다. 3년 전에도 전남 흑산농협이 60억원의 빚을 떠안고 문을 닫은 일이 있었다. 조합원 70여명이 단체로 법원에서 개인회생 및 개인파산 결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례2.포항의 옷가게 점원인 여모씨(31 · 여)는 지난 1월 대형 대부업체에서 300만원을 빌렸다. 총 36개월에 걸쳐 빚을 갚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여씨는 처음 두 달간 10만원씩 입금한 뒤 곧바로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해당 대부업체 관계자는 "대출받을 때부터 갚을 의사는 없으면서,개인회생 신청에 필요한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부업체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며 "이런 수법을 모르던 사람들도 변호사나 법무사에게 조언을 듣고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금융회사로부터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하는 인구가 600만명에 달하면서 채무이행을 회피할 수 있는 노하우를 알려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검은 시장'도 날로 팽창하고 있다. 개인회생과 파산업무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조브로커까지 등장해 최대한 자기 힘으로 돈을 갚으려는 사람들까지 유혹하는 등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법원에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을 신청하기 전에 신용회복위원회(신복위) 등 민간 기구를 먼저 이용하거나 최소한 그 곳의 상담을 거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활개치는 파산브로커
24일 오후 신용회복위원회 서울 영등포지부 앞.신복위 상담소에서 개인워크아웃 상담을 받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한 법률사무소 직원들이 전단지를 나눠줬다. 전단지에는 '신복위는 제도권 금융사들이 공동 출자해 만든 사적 채권추심업소' '국가가 보장하는 공적 채무조정기관인 법원을 찾으세요'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채무자를 가장해 해당 법률사무소에 전화를 걸자 "신복위 개인워크아웃을 이용하면 결국 금융사에 돈을 갚아야 하지만 법원을 이용하면 빚을 한푼도 안 갚아도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채무자들에게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을 신청할 것을 유도하는 '파산브로커'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파산신청을 대신 해주는 대가로 돈을 챙긴다. 신복위 관계자는 "개인워크아웃을 통해 성실하게 빚을 갚으려는 사람들을 꼬드겨 개인파산을 신청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며 "신용회복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기구들이 국가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성실히 빚 갚으면 손해
우리나라의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 구제제도는 크게 사적(私的) 구제제도와 공적(公的) 구제제도로 나뉜다. 사적 구제제도에는 신복위의 개인워크아웃,자산관리공사 산하 신용회복기금의 전환대출,채무재조정 등이 있다. 법원을 통한 개인회생과 개인파산은 공적 구제제도로 분류된다.
사적 구제제도는 원금의 일부라도 갚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개인워크아웃과 채무재조정은 이자는 전액 감면해 주고 원금은 일정 부분 줄여준 다음 최대 8년에 걸쳐 갚도록 하는 제도다. 전환대출은 저신용층(신용등급 7~10등급)이 대부업체 등에서 높은 금리로 빌린 채무를 저금리의 은행대출로 갈아타도록 지원한다.
반면 공적 구제제도는 빚을 아예 탕감해 주거나 사적 구제제도에 비해 훨씬 적은 액수만 갚게 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일정 소득이 있는 사람이 신청하는 개인회생은 법원이 책정한 생계비를 뺀 일정액을 매달 납부하면 된다. 가령 월 소득이 200만원인 A씨가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한다고 치자.법원에서 인정하는 3인 가족 기준 최저생계비가 162만원이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고 매달 38만원씩을 최대 5년까지만 갚으면 된다. 개인워크아웃 등 사적 구제제도가 빚의 규모에 따라 매달 갚아야 하는 금액이 정해지는 반면 개인회생은 빚의 규모와 관계없이 갚아야 할 돈이 정해지는 것이다.
개인파산의 경우는 아예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를 면제해주는 제도다. 법조계 관계자는 "빚을 대부분 탕감해주는 공적 구제제도가 있는데 힘들여서 신복위 등을 찾아갈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우리나라는 사적 구제제도를 이용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개인 파산 심사 강화해야
법무부는 지난달 개인회생 채무변제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줄여주는 내용의 '채무자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통합도산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 개정안이 발의된다면 A씨의 경우 기존에는 빚이 얼마냐에 관계없이 5년간 최대 2280만원을 갚아야 했지만 앞으로는 3년간 1368만원만 갚으면 된다. 채무자들이 공적 구제제도로 몰릴만한 이유가 더 늘어나는 셈이다.
이에 대해 박창균 중앙대 교수는 "현재 법원 파산부 판사의 인원에 비해 사건 수가 너무 많다"며 "판사들이 서류에 의지해서만 개인회생 및 파산 여부를 판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국가가 인정한 채무상담기관에서 상담받은 증명서가 없으면 법원에 파산신청 자체를 못하게 한 미국 등의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도 "사적 구제제도 기관에서 먼저 상담받도록 한다면 개인회생이나 파산신청자가 줄어들 수 있어 사회적 비용을 아낄 수 있다"고 말했다. 파산 전문가들은 "파산신청에 앞서 채무조정상담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는 등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
#사례2.포항의 옷가게 점원인 여모씨(31 · 여)는 지난 1월 대형 대부업체에서 300만원을 빌렸다. 총 36개월에 걸쳐 빚을 갚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여씨는 처음 두 달간 10만원씩 입금한 뒤 곧바로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해당 대부업체 관계자는 "대출받을 때부터 갚을 의사는 없으면서,개인회생 신청에 필요한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부업체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며 "이런 수법을 모르던 사람들도 변호사나 법무사에게 조언을 듣고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금융회사로부터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하는 인구가 600만명에 달하면서 채무이행을 회피할 수 있는 노하우를 알려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검은 시장'도 날로 팽창하고 있다. 개인회생과 파산업무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조브로커까지 등장해 최대한 자기 힘으로 돈을 갚으려는 사람들까지 유혹하는 등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법원에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을 신청하기 전에 신용회복위원회(신복위) 등 민간 기구를 먼저 이용하거나 최소한 그 곳의 상담을 거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활개치는 파산브로커
24일 오후 신용회복위원회 서울 영등포지부 앞.신복위 상담소에서 개인워크아웃 상담을 받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한 법률사무소 직원들이 전단지를 나눠줬다. 전단지에는 '신복위는 제도권 금융사들이 공동 출자해 만든 사적 채권추심업소' '국가가 보장하는 공적 채무조정기관인 법원을 찾으세요'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채무자를 가장해 해당 법률사무소에 전화를 걸자 "신복위 개인워크아웃을 이용하면 결국 금융사에 돈을 갚아야 하지만 법원을 이용하면 빚을 한푼도 안 갚아도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채무자들에게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을 신청할 것을 유도하는 '파산브로커'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파산신청을 대신 해주는 대가로 돈을 챙긴다. 신복위 관계자는 "개인워크아웃을 통해 성실하게 빚을 갚으려는 사람들을 꼬드겨 개인파산을 신청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며 "신용회복을 지원하고 있는 민간기구들이 국가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성실히 빚 갚으면 손해
우리나라의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 구제제도는 크게 사적(私的) 구제제도와 공적(公的) 구제제도로 나뉜다. 사적 구제제도에는 신복위의 개인워크아웃,자산관리공사 산하 신용회복기금의 전환대출,채무재조정 등이 있다. 법원을 통한 개인회생과 개인파산은 공적 구제제도로 분류된다.
사적 구제제도는 원금의 일부라도 갚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개인워크아웃과 채무재조정은 이자는 전액 감면해 주고 원금은 일정 부분 줄여준 다음 최대 8년에 걸쳐 갚도록 하는 제도다. 전환대출은 저신용층(신용등급 7~10등급)이 대부업체 등에서 높은 금리로 빌린 채무를 저금리의 은행대출로 갈아타도록 지원한다.
반면 공적 구제제도는 빚을 아예 탕감해 주거나 사적 구제제도에 비해 훨씬 적은 액수만 갚게 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일정 소득이 있는 사람이 신청하는 개인회생은 법원이 책정한 생계비를 뺀 일정액을 매달 납부하면 된다. 가령 월 소득이 200만원인 A씨가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한다고 치자.법원에서 인정하는 3인 가족 기준 최저생계비가 162만원이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고 매달 38만원씩을 최대 5년까지만 갚으면 된다. 개인워크아웃 등 사적 구제제도가 빚의 규모에 따라 매달 갚아야 하는 금액이 정해지는 반면 개인회생은 빚의 규모와 관계없이 갚아야 할 돈이 정해지는 것이다.
개인파산의 경우는 아예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를 면제해주는 제도다. 법조계 관계자는 "빚을 대부분 탕감해주는 공적 구제제도가 있는데 힘들여서 신복위 등을 찾아갈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우리나라는 사적 구제제도를 이용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개인 파산 심사 강화해야
법무부는 지난달 개인회생 채무변제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줄여주는 내용의 '채무자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통합도산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 개정안이 발의된다면 A씨의 경우 기존에는 빚이 얼마냐에 관계없이 5년간 최대 2280만원을 갚아야 했지만 앞으로는 3년간 1368만원만 갚으면 된다. 채무자들이 공적 구제제도로 몰릴만한 이유가 더 늘어나는 셈이다.
이에 대해 박창균 중앙대 교수는 "현재 법원 파산부 판사의 인원에 비해 사건 수가 너무 많다"며 "판사들이 서류에 의지해서만 개인회생 및 파산 여부를 판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국가가 인정한 채무상담기관에서 상담받은 증명서가 없으면 법원에 파산신청 자체를 못하게 한 미국 등의 사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도 "사적 구제제도 기관에서 먼저 상담받도록 한다면 개인회생이나 파산신청자가 줄어들 수 있어 사회적 비용을 아낄 수 있다"고 말했다. 파산 전문가들은 "파산신청에 앞서 채무조정상담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는 등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