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석굴암, 중생의 해탈 염원 담긴 '대승불교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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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불상이 출현했다. 문화를 식물에 비유할 때 이념이 뿌리라면 예술은 꽃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대승불교라는 새로운 뿌리에서 불상이라는 새로운 꽃이 피어난 것이다. 이 꽃은 비단길을 통해 동서남북을 잇는 길목에서 국제무역의 차익을 얻어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한 '쿠샨제국'이라는 기름진 밭에서 거름을 먹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게 되니 간다라 불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 뿌리도 계속 성장해 인류가 이전엔 보지 못했던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게 된다. 그것이 이른바 8만4000 경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승경전들이다. 이에 '법화경'이나 '반야경'같이 수준 높은 대승경전들이 쏟아져 나온다. 불상이 예배 대상으로 화려하게 발전해나가는 것과 보조를 맞추는 현상이었다.
그 결과 취지를 달리하는 수많은 경전들이 등장하고,이들을 총괄해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논리로 종합할 필요가 있어 '화엄경' 같은 방대한 체계의 경전이 만들어진다. 이런 고급 경전들은 늦어도 4세기께 서역에서 그 정비를 끝내고 5세기 초에는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다. 대역경사(大譯經師)인 구마라집이 406년 '법화경' 7권을 번역하고,불타발타라가 418년 '화엄경' 60권을 번역한 것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법화경'을 이념 기반으로 둔황석굴과 윈강석굴 등 거대한 불상굴을 조영하여 중국 조각 사상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겨놓는다.
그 영향은 우리에게도 미쳐 삼국시대 백제 태안반도엔 법화신앙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예산사면석불'이나 '태안마애삼존불','서산마애삼존불' 등이 조성된다. 이후 신라통일 과정에서는 극락왕생으로 민심을 회유하려는 신라 화엄종의 독자적인 원융 의지에 의해 화엄종지로 아미타불상을 조성하니 신라화엄종 종찰인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좌상'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이제 통일신라 왕국의 문화 절정기를 맞이해 경덕왕(742~765)이 토함산에 화엄불국세계를 구현해내려 하면서는 석굴암에 만법귀일(萬法歸一)과 원융무애의 화엄종지에 입각해 그동안 꽃피워왔던 각종 불교상들을 화엄일승(一乘)의 질서 아래 총체적으로 함축,표현하려 한다.
그래서 석굴암 자체는 석가세존이 상주한다는 영산(靈山)정토를 구현하려 했으니 '석굴암본존석가여래좌상'은 막 마군(魔軍)을 항복시키고 대각을 이루어 부처가 된 순간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결가부좌한 상태에서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을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는 손 모양)이 이를 상징한다. 직후에 '화엄경'을 설했다 하니 '화엄경'을 설하기 직전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본존상은 '법화경'과 '화엄경'의 종지(宗旨)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본존상을 모신 주실의 내벽에는 10대 제자상이 부조돼 있다. 이는 '유마경(維摩經)'의 '제자품(弟子品)'에서만 열거되는 내용의 표현이다. 석가세존이 능력이 뛰어난 제자를 선발해 유마거사에게 문병 가기를 권하는 과정에서 열거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0대 제자 부조상의 상부 감실에 안치한 8대 보살 입체조각상에서 중앙에 서로 마주보게 한 것은 뜻밖에 문수보살과 유마거사상이다. '유마경'에서 말한 대로 문수보살이 석가세존을 대신해 유마거사에게 문병을 가서 법담(法談)을 나누고 있는 장면을 표현한 일종의 유마변상(維摩變相,변상이란 불경의 고사를 문학이나 미술작품으로 표현한 것을 뜻함)이다. 이로 보면 석굴암 주실은 '법화경'에서 말한 영산회상(靈山會相)이면서도 '유마경'의 내용을 도상으로 표출한 유마세계인 것을 알 수 있다.
어째서 이렇듯 영산회상을 유마세계로 꾸며놓았을까. 이는 신라 사람들이 '유마경'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마경'은 재가불자(在家佛子)인 유마거사가 성불(成佛) 행법(行法)하는 내용을 말한 경전이다. 대승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중생(衆生)의 성불이다. 즉 모든 사람들이 해탈을 얻어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보살(菩薩)의 큰 소원은 일체 중생을 큰 수레 즉 대승(大乘)에 태워 함께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대승불교라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최종 목적은 출가자의 수행득도가 아니라 세속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해가는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해탈을 얻는 것이다. 이에 대승경전의 출현 과정에서 최종 단계에는 재가불자가 성불 행법하는 내용의 경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렇게 대승사상을 마무리짓는 경전으로 출현한 것이 '유마경'이다. 그 사실을 신라 사람들이 정확하게 간파했기에 석굴암에 유마변상을 구현해내 대승불교미술의 대미를 장식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0대 제자상이 늘어서 있는 정 가운데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을 조각해 새로 들어온 밀교미술까지 수용했음을 과시하고 있다.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은 밀교경전인 '십일면신주심경(十一面神呪心經)'에 의거해서 전삼면(前三面),좌삼면(左三面),우삼면(右三面),후일면(後一面)의 십면(十面)에 본면(本面)을 보태 십일면을 이룬 관세음보살상이다. 유연한 자태의 몸매에 의복 표현은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고 투명한데 미풍을 맞은 듯 살랑거려 율동감이 넘쳐난다. 정녕 석굴암은 대승으로 소승을 포섭하고 밀교로 대승을 화려하게 장식한 교종불교미술의 총화(總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승불교가 마지막으로 피워낸 최후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