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66) 우진켐‥식품ㆍ약 비닐포장 인쇄 50년 "의약품 10개중 6개는 우리 손 거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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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징집 피해 혈혈단신 월남, 인쇄소 취직계기 1960년 창업
90년대 위기때 미술전공 장남 입사, 시스템 경영 도입…직원수 5배 늘려
90년대 위기때 미술전공 장남 입사, 시스템 경영 도입…직원수 5배 늘려
비닐 알루미늄호일 폴리에틸렌 등의 매끄러운 필름 포장재에 작은 글씨와 디자인을 선명하게 아로새기는 '그라비아' 인쇄는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70~1980년대 남한 사정에 어두웠던 북한의 바닷가 주민들은 남한에서 떠내려온 라면 비닐봉지의 인쇄 상태를 보고 남한의 높은 생활수준을 짐작한 뒤 탈북을 감행하기도 했다.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곤지암리에 자리 잡은 우진켐은 1960년 설립된 뒤 반세기 가까이 그라비아 인쇄 분야에서 한우물을 파왔다. 롯데 농심 크라운 등 자체적으로 인쇄하는 대형 식음료 업체를 제외하면 동종 업계에서 톱10에 들어가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창업자 김수돈 회장(77)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1950년 11월3일 유엔군 철수에 맞춰 월남한 자수성가형 기업인.그의 표현대로 '달랑 팬티 하나만 차고' 남한으로 내려와 지금의 회사를 일궜다. 그의 선친은 독립유공자인 고 김의종 열사로 독립군의 자금 조달을 맡았다. 김 회장이 소년 시절 한 번은 10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만주의 한 형무소에 수감된 아버지를 면회하러 찾아갔는데 선친은 집안일을 걱정하거나 가족을 위로하기는커녕 '곧 해방이 될 것이니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만 남겼다. 이런 선친의 무심함은 그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겼지만 한편으론 강한 생활력을 갖게 된 밑천이 됐다.
그가 선천중학교를 졸업하고 신의주교원대학을 다니던 도중 6 · 25 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에 끌려가기 싫어 산으로 피신한 뒤 같은 처지의 젊은이들과 인민군 세포위원장을 붙잡는등 게릴라활동을 펼쳤다. 전쟁 와중에 곧 재회할 것을 기약하며 어머니를 북에 두고 홀로 월남한 그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나섰다. 2년간 신흥대학(지금의 경희대 전신) 정치과를 다니기도 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데다 학업도 무용하다고 판단, 24세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1956년부터 5년간 포장지를 인쇄하는 중앙문화인쇄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강한 근성 덕에 회사 인쇄 물량의 약 70%를 따왔다. 그러다 회사가 도산하고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자 1960년 마포에 우진특수인쇄공사를 차렸다.
창업 후 가장 어려운 것은 물량을 수주하는 일이었다. 콧방귀도 뀌지 않는 모 제약사 구매담당자를 매일 출퇴근 시간에 맞춰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인사하는 방법으로 접근해 기필코 오더를 받아냈다. 현재 국내 의약품 포장재 인쇄물의 60% 이상을 차지하게 된 것도 여기서 시작됐다.
회사는 순탄하게 성장,1978년 서울 마포구 용강동에 사옥을 마련했다. 1987년 국내 최초로 지퍼백 포장재를 개발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로부터 수출 허가를 받았고 이를 전담하는 자회사인 대왕인터내셔날을 세웠다. 1992년 마포 시대를 마감하고 곤지암으로 본사와 공장을 옮겼다. 그러나 몇몇 직원이 지방 근무를 기피해 회사를 떠나고 후발 기업들이 치고 들어오면서 수주량이 급감하는 등 시련이 찾아왔다.
나이도 먹어 회사를 접으려는 차에 1993년 구원투수처럼 장남 상우씨(44)가 입사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상우씨는 패션사업을 꿈꿨지만 그라비아 인쇄업의 가능성과 안정성을 높게 보고 가업을 잇기로 했다. 그는 미대 출신이라 인쇄물의 색감을 바라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그러나 직원들은 인쇄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각종 아이디어를 내놓는 상우씨를 곱게 보지 않았다. "왜 설치고 다니냐" "별 것 아닌데 왜 문제 삼느냐" "못해 먹겠다" "나가라"고 언성을 높였다.
이뿐만 아니었다. 상우씨가 입사한 이듬해에 컴퓨터를 도입하려 하자 직원들은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되는데 인쇄 현장에서 무슨 컴퓨터가 필요하냐며 반발했다. 1999년에 'ISO 9002(품질경영)' 인증을 추진할 때에도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길 거부하는 직원들의 동요가 거셌다.
하지만 상우씨는 근로자의 숙련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주먹구구식 품질관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려면 이 같은 일련의 경영혁신이 절실하다고 보고 직원들에게 넉살을 부리면서 때론 부딪히고 깨지면서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이런 노력에 보태어 미리 원자재를 다량 확보하고 최신 설비로 교체한 결과 외환위기는 오히려 회사가 크게 성장하는 전기가 됐다.
2002년엔 업계 최초로 ERP(전사적 자원관리)를 도입했다. 현재 일부 대형 업체도 ERP를 도입하지 않아 수작업으로 포장지 인쇄를 관리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당시 우진켐의 ERP 추진은 무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웅제약 계열 인성정보로부터 ERP의 높은 업무효율성을 깨닫게 된 상우씨는 반발하는 직원들을 설득해 ERP를 정착시켰다. 그 결과 과거에 발주 후 인쇄,세금계산서 발행까지 24시간이 소요되던 일이 지금은 6시간이면 족하다. 2004년에는 업계 최초로 생산시점관리 정보화(POP)까지 들여왔다. 과거에는 숙련 인력이 나가면 몇 달간 인쇄품질이 저하되는 문제가 발생했지만 지금은 ERP와 POP 덕분에 초보자도 큰 문제없이 공장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상우씨는 2001년 아버지의 신임을 받아 사장에 취임했다. 1995년에 입사한 동생 상진씨(43)가 지난해 사장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형이 영업과 기획을 맡고,동생이 재무 · 생산 · 인사관리를 하는 역할 분담체계가 정착돼 있다. 경쟁 업체보다 한발 앞선 정보화와 적기 투자로 2000년 이전까지 수십억원에 그치던 매출과 10여명에 불과한 직원은 지난해 각각 115억원과 50여명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야간잔업을 해야 수주물량을 소화할 정도로 순항하고 있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