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대기업이 만든 기업형 슈퍼마켓(Super Supermarket, SSM)을 규제하기 위해 사업조정제란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사업조정제는 대기업의 사업진출로 중소기업의 피해가 예상되는 경우 정부가 권고의 형식으로 대기업의 사업을 제한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최근 동네 슈퍼 상인들이 사업조정을 신청하자 SSM이 입점을 보류하는 등 사업조정제가 실제로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청은 어제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부터 조정권한을 지방자치단체에 넘기겠다고 밝혔습니다. 전국 각지의 조정신청을 해당 지역에 맡겨 신속하게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중기청은 또 시ㆍ도지사가 SSM의 사업진출 시기는 물론 점포면적과 취급품목, 영업시간 등을 제한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사업조정제도는 매장이 들어서기 전에만 할 수 있으니 신청만 하면 대기업의 입점 계획을 미리 알려주겠다는 친절(?)도 베풀었습니다. 정부가 중소상인을 돕겠다니 일단 환영할 만합니다. 하지만 올 초부터 기업형 슈퍼마켓 문제를 취재해 온 기자 입장에선 그 진정성에 의문이 가시지 않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정부는 SSM 규제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유통시장을 개방하기로 한 WTO 협정에 위배되기 때문이란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에 대해 법학자나 통상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렸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의견이 분분하니 규제안을 도입하고 문제가 되면 나중에 해결하는 것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식경제부 담당자는 "우리나라가 후진국도 아니고 실험적인 정책을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나서자 분위기는 180도 달라집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25일 서울 이문동 골목상가를 방문해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 식은 안되니 같이 사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중기청은 그 연구결과를 어제 언론에 대대적으로 공개한 것입니다. 홍석우 중기청장은 과잉 규제 논란을 의식했는지 발표 내용이 이미 법령에 규정돼 있었다고 수 차례 강조했습니다. 예전부터 법령으로 SSM의 점포면적과 취급품목, 영업시간을 규제할 수 있었다면 최근 몇 달 동안 빚어진 혼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대형 유통업체를 규제하겠다며 국회에 계류중인 수 십 가지 법안과 지금까지 WTO 규정을 둘러싸고 진행된 토론은 모두 물거품이 됐습니다. 사회적으로 첨예한 대립이 벌어질 때마다 정부는 법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같은 사안을 두고 몇 달만에 널뛰 듯 법적용을 하는 정부가 과연 법치를 얘기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승필기자 splee@wowt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