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영어는 괴로워‥외국인 상사와는 눈인사만…"오늘도 그냥 지나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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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은행에 다니는 홍성우 과장(34)은 얼마 전의 악몽 같았던 영어 프레젠테이션만 생각하면 가슴이 오그라든다. 발표는 그럭저럭 넘겼다. 내용을 달달 외운 덕분이다. 문제가 된 건 질의응답.외국인 상사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진 탓이다. 몇 차례의 "파든(pardon ·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끝에 질문 내용은 겨우 이해했다. 그렇지만 답변이 쉽지 않았다. 단어는 머리 속에서만 맴돌 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후 홍 과장은 외국인 상사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피한다. 엘리베이터에서조차 만날까봐 노심초사한다. 홍 과장처럼 영어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글로벌화로 각 기업마다 외국인 임원들이 대거 영입되고 있다. 사내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기업도 증가 추세다. 그러다 보니 '영어 포비아(phobia)'에 떨고 있는 김 과장,이 대리도 부지기수다.
◆혀끝에서만 맴도는 잔인한 너,영어
대기업에 다니는 장 상무(51)는 매주 월요일이 두렵다. 실적이 나빠서가 아니다. 참신한 보고 거리가 없어서도 아니다. 영어로 진행하는 회의 때문이다. 미국은 물론 유럽 일본 출신의 외국인 임원들이 하나 둘 늘면서 언제부터인가 영어가 사내 공식 언어가 됐다. 아무리 영어로 진행되는 회의라지만,회사밥을 25년이나 먹은 장 상무가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무언가 놓쳤을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 보니 회의가 끝나면 다른 임원을 찾아 회의 내용을 확인하곤 한다. 자존심이 상해 죽을 맛이다. 이를 떨치기 위해 1주일에 세 번 새벽 시간을 내 회화 공부를 하고 있지만,이미 굳어 버린 귀와 입은 쉽게 말랑말랑해질 기미가 없다.
사내의 각종 회의 보고서나 기획안을 만들 때도 영어가 기본이다. 읽는 건 어떻게 한다지만,막상 글을 영어로 써야 한다는 부담도 크다. 장 상무는 "다 늙어 영어 때문에 고생할 줄 몰랐다"며 "젊었을 때 현장만 뛰어다닌 게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국내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전주익 대리(30).그는 명문대 영문과 출신이다. 군대도 카투사로 다녀왔다. 대학 때는 1년 동안 미국에서 어학 연수도 마쳤다. 영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웬걸.2년 전 인도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화로 산통이 깨졌다. 인도 특유의 액센트 탓에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부장과 후배 사원까지 옆에서 듣고 있었던 탓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긴장은 극에 달했다. 한참을 버벅거리다 결국 인도인에게 이메일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전 대리는 그러나 이메일조차 받지 못했다. 이메일에 들어가는 '골뱅이(@ · 앳)'의 영어 표현이 갑자기 생각 나지 않아서다. 결과적으로 엉뚱한 주소를 불러 준 셈이니 이메일이 도착할 리 만무했다.
◆토익 점수 올리려 대리 시험도
대형 건설사에 몸담고 있는 김 상무(52)는 임원 승진 과정에서 겪은 영어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 땀이 흐른다. 임원 승진 후보가 된 3년 전 회사에서는 일정 수준의 토익 점수를 받아야만 임원 승진이 가능해지는 제도를 도입했다. 'Hi''Hello'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의 전부였던 김 상무로선 당황할 수밖에.당장 영어학원에서 모의 테스트를 봤지만 '역시나'였다. 회사가 요구하는 조건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영업 담당이다 보니 독하게 영어 공부에 매달릴 수 있는 여건도 안 됐다. 그렇다고 승진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그는 눈 딱 감고 대리 시험을 봐 줄 사람을 구했다. 간신히 커트 라인을 넘긴 점수를 받아들고 승진할 수 있었다. 김 상무는 "50대 들어서 갑자기 영어하라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하소연했다.
K그룹 지적재산권팀에 근무하는 한승민 대리(29).그는 학창 시절부터 영어라면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술까지 끊고 꼬박 1년을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대리 승진에 필수인 토익 550점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특허권 업무가 영어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은 아니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영어 성적 미달로 동기 중 유일하게 승진에서 밀리는 수모를 당했다"며 "올해 겨우 턱걸이로 승진했지만 얼마 안 있어 과장 기준 점수 700점을 따야 하는데 또 떨어질까봐 요즘 소화가 안 된다"고 말했다.
◆때론 뻔뻔함이 통한다
지난해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외국제품 수입업체로 이직한 김주영씨(여 · 31)는 영어 때문에 이직에 실패할 뻔했다. 생활영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직 제의에 냉큼 응했다. 그런데 막상 요구하는 영어 수준이 생각보다 높았다. 매일 계속되는 영문 이메일과 보고서 작성 요구는 '공포'에 가까웠다. 대충 쓰면 커뮤니케이션은 되겠지만 '공식 문서'에 사용되는 정확한 어법과 표현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중요한 메일이나 보고서의 경우 영작한 표현을 토막 내 구글에 돌려 본다. 많이 쓰는 표현인지 아닌지를 검증하기 위한 자체 감수 과정이다. 김씨는 "이직 전 6개월 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도 벼락치기라 별 효과가 없었다"며 "지금도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 서비스를 통해 하루 50분씩 외국인과 전화 영어를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신지인 과장(여 · 33)은 뻔뻔함으로 영어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그는 "원래 미국인이 아닌데 어떻게 영어를 잘할 수 있느냐"며 본인의 '저질 영어'를 합리화한다.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해 "아이가 얘기하는 것 같다"는 비아냥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더듬거리며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을 보면 웃음이 나오는 것처럼 영어를 못하는 우리를 보고 미국인들이 웃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는 "업무에 관련된 부분에 한해 메시지만 정확히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 발과 그림을 다 동원해서 얘기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잘못 알아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과 업무를 할 때는 "이메일로 내용을 보내 달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아예 다른 외국어로 갈아타라
영어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위해 '제3의 길'을 택하는 전법도 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조성모씨(40)는 영어를 포기하고 아예 전공을 일본어로 돌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영어 실력이 잘 늘지 않는 데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주위에 너무 많아서였다. 2년 정도 학원에 다닌 그의 일본어는 현재 수준급이다. 조씨는 "영어를 2년 했다면 이렇게 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직장 내 희소 가치도 높은 편이어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대기업 일본 주재 상사원으로 나가 있는 이준모 과장(36)도 영어 대신 일본어 우물을 파서 성공한 사례다.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한 이 과장은 지속적으로 일본어 실력을 연마,젊은 나이에 일본 주재 상사원으로 발탁됐다. 그는 "회사 성격상 일본과의 사업이 활발한데도 동료들이 모두 영어에만 매몰돼 있어 일본어 할 줄 아는 직원을 찾기가 힘들 정도"라며 "요즘 들어 일본어나 중국어로 갈아타는 동료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호/이관우/정인설/이상은 기자 dolph@hankyung.com
이후 홍 과장은 외국인 상사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피한다. 엘리베이터에서조차 만날까봐 노심초사한다. 홍 과장처럼 영어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글로벌화로 각 기업마다 외국인 임원들이 대거 영입되고 있다. 사내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기업도 증가 추세다. 그러다 보니 '영어 포비아(phobia)'에 떨고 있는 김 과장,이 대리도 부지기수다.
◆혀끝에서만 맴도는 잔인한 너,영어
대기업에 다니는 장 상무(51)는 매주 월요일이 두렵다. 실적이 나빠서가 아니다. 참신한 보고 거리가 없어서도 아니다. 영어로 진행하는 회의 때문이다. 미국은 물론 유럽 일본 출신의 외국인 임원들이 하나 둘 늘면서 언제부터인가 영어가 사내 공식 언어가 됐다. 아무리 영어로 진행되는 회의라지만,회사밥을 25년이나 먹은 장 상무가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무언가 놓쳤을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 보니 회의가 끝나면 다른 임원을 찾아 회의 내용을 확인하곤 한다. 자존심이 상해 죽을 맛이다. 이를 떨치기 위해 1주일에 세 번 새벽 시간을 내 회화 공부를 하고 있지만,이미 굳어 버린 귀와 입은 쉽게 말랑말랑해질 기미가 없다.
사내의 각종 회의 보고서나 기획안을 만들 때도 영어가 기본이다. 읽는 건 어떻게 한다지만,막상 글을 영어로 써야 한다는 부담도 크다. 장 상무는 "다 늙어 영어 때문에 고생할 줄 몰랐다"며 "젊었을 때 현장만 뛰어다닌 게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국내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전주익 대리(30).그는 명문대 영문과 출신이다. 군대도 카투사로 다녀왔다. 대학 때는 1년 동안 미국에서 어학 연수도 마쳤다. 영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웬걸.2년 전 인도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화로 산통이 깨졌다. 인도 특유의 액센트 탓에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부장과 후배 사원까지 옆에서 듣고 있었던 탓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긴장은 극에 달했다. 한참을 버벅거리다 결국 인도인에게 이메일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전 대리는 그러나 이메일조차 받지 못했다. 이메일에 들어가는 '골뱅이(@ · 앳)'의 영어 표현이 갑자기 생각 나지 않아서다. 결과적으로 엉뚱한 주소를 불러 준 셈이니 이메일이 도착할 리 만무했다.
◆토익 점수 올리려 대리 시험도
대형 건설사에 몸담고 있는 김 상무(52)는 임원 승진 과정에서 겪은 영어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 땀이 흐른다. 임원 승진 후보가 된 3년 전 회사에서는 일정 수준의 토익 점수를 받아야만 임원 승진이 가능해지는 제도를 도입했다. 'Hi''Hello'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의 전부였던 김 상무로선 당황할 수밖에.당장 영어학원에서 모의 테스트를 봤지만 '역시나'였다. 회사가 요구하는 조건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영업 담당이다 보니 독하게 영어 공부에 매달릴 수 있는 여건도 안 됐다. 그렇다고 승진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그는 눈 딱 감고 대리 시험을 봐 줄 사람을 구했다. 간신히 커트 라인을 넘긴 점수를 받아들고 승진할 수 있었다. 김 상무는 "50대 들어서 갑자기 영어하라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하소연했다.
K그룹 지적재산권팀에 근무하는 한승민 대리(29).그는 학창 시절부터 영어라면 죽기보다 싫어했다. 그러던 그가 지난해 술까지 끊고 꼬박 1년을 영어 공부에 매달렸다. 대리 승진에 필수인 토익 550점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특허권 업무가 영어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은 아니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영어 성적 미달로 동기 중 유일하게 승진에서 밀리는 수모를 당했다"며 "올해 겨우 턱걸이로 승진했지만 얼마 안 있어 과장 기준 점수 700점을 따야 하는데 또 떨어질까봐 요즘 소화가 안 된다"고 말했다.
◆때론 뻔뻔함이 통한다
지난해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외국제품 수입업체로 이직한 김주영씨(여 · 31)는 영어 때문에 이직에 실패할 뻔했다. 생활영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직 제의에 냉큼 응했다. 그런데 막상 요구하는 영어 수준이 생각보다 높았다. 매일 계속되는 영문 이메일과 보고서 작성 요구는 '공포'에 가까웠다. 대충 쓰면 커뮤니케이션은 되겠지만 '공식 문서'에 사용되는 정확한 어법과 표현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는 중요한 메일이나 보고서의 경우 영작한 표현을 토막 내 구글에 돌려 본다. 많이 쓰는 표현인지 아닌지를 검증하기 위한 자체 감수 과정이다. 김씨는 "이직 전 6개월 동안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도 벼락치기라 별 효과가 없었다"며 "지금도 인터넷 전화 스카이프 서비스를 통해 하루 50분씩 외국인과 전화 영어를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신지인 과장(여 · 33)은 뻔뻔함으로 영어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그는 "원래 미국인이 아닌데 어떻게 영어를 잘할 수 있느냐"며 본인의 '저질 영어'를 합리화한다.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해 "아이가 얘기하는 것 같다"는 비아냥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더듬거리며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을 보면 웃음이 나오는 것처럼 영어를 못하는 우리를 보고 미국인들이 웃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는 "업무에 관련된 부분에 한해 메시지만 정확히 전달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 발과 그림을 다 동원해서 얘기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잘못 알아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과 업무를 할 때는 "이메일로 내용을 보내 달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아예 다른 외국어로 갈아타라
영어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위해 '제3의 길'을 택하는 전법도 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조성모씨(40)는 영어를 포기하고 아예 전공을 일본어로 돌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영어 실력이 잘 늘지 않는 데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주위에 너무 많아서였다. 2년 정도 학원에 다닌 그의 일본어는 현재 수준급이다. 조씨는 "영어를 2년 했다면 이렇게 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직장 내 희소 가치도 높은 편이어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대기업 일본 주재 상사원으로 나가 있는 이준모 과장(36)도 영어 대신 일본어 우물을 파서 성공한 사례다.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한 이 과장은 지속적으로 일본어 실력을 연마,젊은 나이에 일본 주재 상사원으로 발탁됐다. 그는 "회사 성격상 일본과의 사업이 활발한데도 동료들이 모두 영어에만 매몰돼 있어 일본어 할 줄 아는 직원을 찾기가 힘들 정도"라며 "요즘 들어 일본어나 중국어로 갈아타는 동료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호/이관우/정인설/이상은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