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보기술(IT) 업체인 퀄컴이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했다는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2600억원의 과징금을 맞았다. 단일 기업에 대한 과징금 규모로 사상 최대인 데다 세계 경쟁당국 가운데 한국이 처음으로 퀄컴에 칼을 빼들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불공정 거래 행위에 대해선 어떤 다국적 기업에도 예외를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퀄컴은 CDMA 원천기술을 보유한 글로벌 휴대폰용 칩세트 회사로,국내에서 삼성전자 LG전자 등에 각종 모뎀칩을 공급하고 있다. 퀄컴의 한국 시장 매출액은 한 해 2조5000억~3조원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퀄컴,최대 과징금 받은 이유는

공정위 조사 결과 퀄컴은 CDMA 통신기술 등을 휴대폰 제조사에 제공하면서 자사 제품이 아닌 경쟁사 모뎀칩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차별적으로 높은 금액을 부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퀄컴 모뎀칩을 사용하면 기술 사용료로 5%만 받지만 다른 회사의 모뎀칩을 쓰면 5.75%를 부과하는 식이다.

또 휴대폰 제조사에 CDMA 모뎀칩과 RF칩(휴대폰과 기지국 사이의 송 · 수신을 위한 장치) 등을 판매하면서 수요량의 대부분을 자사로부터 구매하는 조건으로 리베이트를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공정위는 예를 들어 A사가 모뎀칩 수요의 85% 이상을 퀄컴에서 사면 퀄컴은 구매액의 3%를 줬다고 설명했다. 리베이트 규모는 2004년까지는 분기당 약 420만달러(약 52억원),그 이후에는 분기당 약 820만달러(약 102억원)로 조사됐다.

이 밖에 CDMA 통신기술을 휴대폰 제조사에 공급하면서 해당 특허권이 소멸하거나 효력이 없게 된 이후에도 종전 로열티의 50%를 계속 받을 수 있도록 조건을 거는 등 각종 불공정 행위를 했다고 덧붙였다.

공정위는 휴대폰 업체에 모뎀칩을 팔면서 통신 기능 외에 동영상 등을 구현하는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를 함께 끼워 팔아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한 혐의에 대해서는 계속 조사를 벌일 계획이라고 전했다.

불공정 행위,"다국적 기업도 예외 없다"

공정위가 다국적 IT 업체를 제재한 것은 2006년 2월 마이크로소프트(MS)와 2008년 6월 인텔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업계 관계자는 "퀄컴 사건은 미디어 플레이어 및 메신저 등을 끼워 판매한 MS 사건과 컴퓨터 제조업체들에 경쟁사인 AMD의 칩 대신 자사의 칩만을 공급받는 조건으로 리베이트를 제공한 인텔 사건의 종합판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공정위는 MS와 인텔에 각각 325억원,26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번 공정위의 결정은 해외 규제 당국의 불공정 거래 제재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유럽연합(EU) 정부가 지난 5월 인텔의 불공정 행위에 대해 1조8000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과징금을 부과한 것도 앞서 공정위가 인텔을 제재한 것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영구 퀄컴코리아 사장은 공정위 발표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이번 발표 내용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수용하기 어렵고 법적 절차를 통해 방어할 기회를 갖겠다"고 반박했다.

차 사장은 "퀄컴 칩을 사용하는 기업에 로열티를 할인해 준 것을 로열티 차별로,칩 구매량에 따라 인센티브를 준 데 대해 배타 조건부 리베이트라고 공정위가 언급했다"며 유감을 나타냈다.

이어 "퀄컴은 한국 기업들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으며 삼성전자 LG전자 등 파트너들과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왔다"며 "이번 공정위의 판단은 한국 휴대폰 제조사의 글로벌 경쟁력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

모뎀칩=사람의 음성을 디지털 신호로 바꾸고 이를 다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아날로그 신호로 변조해 주는 휴대폰의 핵심 통신장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