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불상 연구가 학문적 목표였던 필자는 1971년부터 '계주고'라는 논문을 통해 인도에서의 불상 출현 과정을 밝히고 있었다. 이후 불상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각 시대마다 어떻게 그 양식을 변천시켜 나가는가 하는 사실을 미술사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인도와 중국 불상의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편년(編年)하고,그 과정에서 우리 불상의 편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늘 고심하고 있었다. 우리 불상은 상대적으로 제작 연대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기년작(記年作)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간송미술관에서 '추사전(秋史展)'을 열기 위해 추사 연구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드디어 '추사집(秋史集)'을 번역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겸해서 겸재(謙齋) 연구를 통해 조선왕조 오백년 정체설을 극복하려는 준비를 남모르게 진행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1974년 정병삼 교수가 최초의 제자로 입문해 오고 그 다음 해부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에 출강하여 유봉학 교수,이세영 교수,지두환 교수,조명화 교수 등을 얻는다. 이에 간송미술관에서 이들 제자와 주야로 만나 강학하고 담론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담론 자리에서 기록의 윤색성을 지적하는데 한 제자가 그렇다면 미술사를 통해서 윤색성을 제거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할 수 있지.그래서 불상 연구를 하려는 게 아니냐.다만 편년이 정확해야 하는데,우리는 기년작이 너무 부족하단 말이야.그래서 고심 중이다. 일정 기간 불상과 같이 같은 주제를 가지고 기년을 분명히 한 미술품이 있었으면 좋겠는데.그렇다면 그 변천 유형을 불상편년에 적용하면 되거든." 이렇게 대답하고 났는데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머리를 치고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있다. 조선왕릉 석물 연구를 하면 되겠구나. 오백년 동안 동일 주제로 일사불란하게 조성하면서 그 조성 시기를 정확하게 밝혀 놓지 않았느냐.어디 그뿐이냐.그 조성 과정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남기고 있다. '

이 순간 조선왕릉 조사를 먼저 단행해야겠다 결심하고 제자들과 대학원에 진학하면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드디어 1977년 모두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 해 3월부터 왕릉 조사를 시작해 만 3년간 태조 건원릉으로부터 고종 · 순종의 홍유릉에 이르기까지 실측 · 촬영 · 도면 작성 등의 작업을 진행했다. 한편으로는 역대 왕조실록을 비롯한 산릉(山陵)도감의궤,국장도감의궤 등을 발췌 복사하고 문집이나 기타 여러 문헌 속에서도 왕릉 조성 관계 기록을 샅샅이 뒤져 내는 작업을 계속해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가설이 사실과 너무 일치하는 데 놀랐다. 조선왕조 문화의 실체를 그 석의(石儀) 양식의 변화에서 정확하게 읽어 낼 수 있었다. 조선왕조 오백년 정체설이 얼마나 황당한 식민 사관인지 언급할 필요도 없이 조사대원 전체가 묵시적으로 공감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영조 33년(1757)에 조성된 영조 정성왕후 홍릉(弘陵) 석인(石人) 모습이 당시 서울 사람의 사실적 용모임을 보고 진경 시대라는 문화사적인 시대 명칭을 부여하자는 제안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해는 겸재가 82세 나던 때로 동시대를 살며 사생 조각으로 겸재의 진경 풍속화와 쌍벽을 이루던 천재 조각가 최천약(崔天若 · 1684~1755)이 돌아간 지 2년 뒤의 일이니 그 조각 기법을 계승하고 있던 후배와 제자들의 솜씨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왕릉조사 보고서나 왕릉 연구를 세상에 내놓는 일을 유보하기로 했다. 그 시절은 조선왕조 오백년 정체설이 정설로 되어 거의 모든 조선사 관계 논문이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연구 결과를 갑자기 발표하면 엄청난 충격으로 자기방어를 위해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우리가 왕릉 조사를 했고,그 연구를 진행하는 사실을 구두로 흘리면 각기 관련 학자들이 자체 수정을 해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30여년을 기다리며 발표 시기를 가늠하고 있다. 끊임없이 기록 보충을 더하며 시대 상황과 문화 현상을 연계시키는 작업을 계속하면서 말이다.

사실 30여년 전에 우리는 세종대왕 구영릉(舊英陵) 석인이 현재 순조 인릉(仁陵)에 세워진 석인이고,홍릉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 옮겨간 석인이 중종 장경왕후 구희릉(舊禧陵) 석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양식 추적과 산릉도감의궤를 확인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 연구 목적이 아니었기에 연구 결과를 밝힐 때 자연스럽게 알려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제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그 중요성이 인정됐고 조선왕조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학계에 점차 정착되어 가고 있으니,한 세대 30년을 묵혀 온 왕릉 연구 결과를 이제는 세상에 내놓아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학구열이 얼마나 치열했으면 삼복 중에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서삼릉,서오릉을 하루 종일 헤매고 다녔던지! 그래서 이 정경을 지켜보던 어떤 분이 우리 연구원들을 보고 돈을 얼마나 받기에 이렇게 열심이냐고 묻더란다. 그 말에 우리 모두가 서로 마주보고 크게 웃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때 우리는 시간과 짐을 줄이기 위해 큰 수박을 아침에 사가지고 들어가서 하루 종일 이동하면서 수평으로 돌려 잘라 먹고 다녔는데,간송미술관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수박을 보관하며 잘라 먹고 있어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