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연료 재처리문제가 다시 한 · 미 간의 현안으로 떠올랐다. 첫 언급은 지난달 말 앨런 타우처 미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의 "재처리를 위한 한 · 미원자력협정 개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발언이었다. 그러자 우리 유명환 외교부 장관은 "핵연료 공급 · 재처리의 상업적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조속히 협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되받았다. 정부는 오는 10월부터 협상에 나서 저농축 우라늄 생산을 포함한 핵물질 처리의 유연성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양국이 상반된 입장이지만,'뜨거운 감자'인 핵연료 재처리에 대한 공개적 거론 자체가 상당한 함의(含意)를 갖고 있다. 외교가의 얘기로도 이 문제가 꽉 막힌 상황만은 아닌 것 같다. 조율의 여지가 없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의 핵연료 재처리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1973년 개정돼 2014년까지 효력을 갖는 한 · 미 원자력협정이다. 이 협정은 우리가 핵물질을 재처리하거나 형태 및 내용을 변형할 경우 미국의 '사전동의' 또는 '공동결정'을 전제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남북한이 핵재처리와 우라늄 농축시설을 갖지 않는다'고 한 1992년의 한반도 비핵화선언이다. 문제는 한 · 미 원자력협정이 우리의 독자적 핵연료 개발을 위한 주권행사를 원천 봉쇄하고 있는 불평등 협정이라는 점이다. 한반도 비핵화선언은 이미 북한의 핵개발로 휴지조각이 된 지 오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핵연료의 '재활용'에도 접근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이 대표적이다. 기존의 습식(濕式)공법 재처리가 타고 남은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따로 추출해 핵무기로 전용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이 기술은 건식정련(乾式精鍊)으로 미량의 다른 동위원소가 혼합된 형태의 플루토늄을 뽑아낸다. 핵무기로 바꾸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 방법을 적용하면 사용 후 핵연료를 이론적으로 100% 재활용해 핵폐기물의 양을 지금의 2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국내 20기의 원전에서 나오는 매년 700t의 사용 후 핵연료가 벌써 1만t 넘게 발전소 내 수조(水槽)에 임시보관되고 있고,그 마저도 2016년이면 포화상태에 이르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기술에 관한 한 우리가 세계 최고수준의 연구능력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실용화하는 길로는 한 발짝도 못 나가는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핵연료 재처리는 우리의 오랜 숙원(宿願)이다. 1972년 프랑스와 맺은 원자력기술협력협정이 그 시도였다. 이를 통해 재처리 연구시설 도입과 기술개발 단계까지 갔으나 1974년 인도의 핵실험에 따른 미국과 소련의 핵확산금지 조치 강화로 결국 무산됐고 그런 상태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1990년대 김영삼 정부 때도 재처리 및 농축시설 보유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재처리 허용의 선례가 있다. 일본은 1988년 나카소네 정권 당시 미국으로부터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이용 등에 대한 실험 및 연구권리를 포괄적으로 보장받아 로카쇼무라에 대규모 재처리시설을 보유한 상태다.

세계 5위의 원자력 대국인 우리가 평화적인 핵이용까지 제약받을 이유는 없고,핵연료 재처리는 핵무장 논의와 별개인 경제적 사안이다. 현실적으로도 재처리는 절실한 국가차원의 과제이기도 하다. 원자력이야말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성장의 핵심 수단이고,재처리를 통한 핵연료주기의 완성없이는 기술자립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확대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 정부의 굳은 의지가 요구되는 이유다. 확실하게 재처리 권리를 요구하고 반드시 관철시켜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끊임없는 북의 핵과 미사일 도발로 국제정세도 우리에겐 불리하다. 그래도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결코 안된다.

추창근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