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3500억원을 들여 4만2000명 규모의 '교육 · 문화 이노밸리'로 조성하는 충북 혁신도시(중부신도시)가 들어서는 진천 · 음성 일대는 그야말로 '깡촌'이다. 대대로 농사를 짓던 지역이었던 탓에 변변한 식당이나 상점도 없다. 배후도시도 없다. 땅 면적이 521㎢에 달하는 음성군 인구는 고작 9만명이며,진천(406㎢)에는 6만여명이 거주할 뿐이다. 반면 계획인구는 광주 · 전남 혁신도시(나주 · 5만명) 다음으로 많다.

1단계 사업이 완료되는 2012년,과연 충북 혁신도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지역민의 바람대로 충북의 새로운 교육 · 문화 거점이 될 수 있을까. 12개 이전 대상 공공기관 중 지금까지 이전계획 승인을 받은 곳은 교육개발원 기술표준원 등 단 4곳뿐.한국노동교육원은 공공기관 혁신 방안에 따라 폐지로 결정났고,정보통신정책연구원은 아직 확정은 안됐지만 민영화가 거론되고 있다.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은 한국전자거래진흥원(진주 혁신도시) 및 정보통신연구진흥원(대전)과 '3자 합병'이 결정돼 통합기관이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없는 상태다. 한국인터넷진흥원 역시 한국정보보호진흥원(광주 · 전남 혁신도시)과 합쳐지는 만큼 충북행(行)을 장담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이전 기관이 8개로 줄어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 혁신도시 로드맵이 없다

가족은 모두 수도권에 떼어놓고 혼자 내려와 금요일 오후면 다들 집으로 올라갈 생각부터 하는 공기업 사무실 풍경이 그려진다. 1동에 20명이 채 살지 않는 아파트 단지는 주말에는 더욱 을씨년스럽다. 가족과 함께 내려온 일부 공기업 직원들은 도대체 사람 냄새가 안 나 못살겠다며 다시 서울 지사(?)로 전보갈 궁리밖에 하지 않는다.

그래도 신도시인데 시장을 선점하자며 3300㎡짜리 대형 슈퍼를 연 김씨는 석 달째 임대료도 못낼 정도가 되자 순진했던 자신이 밉기만 하다. 인근 자전거점과 옷가게,안경점에는 '점포 정리세일'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공기업 이전을 계기로 대규모 산 · 학 클러스터와 문화 · 복지 · 교육시설을 대거 유치하겠다는 구상이 어그러지면서 가게를 연 상인들도 낭패를 보고 있는 것.

공기업은 내려왔지만 정작 '혁신'을 견인할 역량이 있는 기업과 학교가 도시를 외면한 데 따른 것이다. 때문에 도시 건설 때 책정했던 목표인구를 절반도 못 채우는 상황이다. 음악학원을 차렸다가 큰 손실을 본 박씨는 "시골에 달랑 신도시 하나 지어 놓고 혁신도시라고 지역민들에게 희망을 품게 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정부를 힐난한다.

상상에 의존한 그림이지만 전국 10개 혁신도시 중 이 같은 픽션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거의 없다. 모든 공기업들이 예정대로 이전할지도 확실하지 않은 데다 지방 혁신을 이끌 수 있는 클러스터 조성 여부는 더욱 안갯속이기 때문이다.

경북 김천시 농소 · 남면 일대 3829㎢에 총 9185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할 예정인 김천 혁신도시의 경우 목표인구는 2만5000명이지만 이전 대상 공기업 직원 숫자는 4000여명에 불과하다. 가족들이 같이 온다 하더라도 나머지 인구를 채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고용유발 효과가 큰 대표 산업이 없는 상황에서 혁신도시의 비전으로 내건 △미래형 자동차 부품 △농생명 △신재생 에너지 클러스터를 조성할 수 있는 구체적 로드맵이 취약하다는 지적 때문이다.


# 토지가 안팔린다

혁신도시 건설이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이는 근본적인 요인은 세종시와 마찬가지로 사업 실행 가능성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혹시 이전이 백지화될 가능성에 대비,대다수 공기업들은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가동하지 않고 있다. 지금껏 네 차례에 걸쳐 지방 이전 승인을 받은 공공기관들조차 정부 눈치만 보며 부지 매입과 기존 사옥 매각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대한주택공사나 한국토지공사 등과 함께 사업 공동 시행에 나선 지방자치단체들은 수천억원대의 지방채까지 발행해 이미 토지 수용을 마쳤지만 이 토지를 사겠다고 달려드는 공기업은 거의 없다.

김천 혁신도시도 정성들여 닦아놓은 부지가 팔리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다. 김천시의 정제룡 혁신도시건설지원단장은 "한국도로공사를 필두로 총 13개 공기업들이 옮겨올 예정이지만 아직 토지 매입 계약을 체결한 기업은 한 곳도 없다"고 전했다. 시청의 또 다른 관계자는 "공기업들은 이전계획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며 "하지만 현 상태에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자신(공기업)들만 손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근린생활시설 완공이 그만큼 지연돼 가족들의 생활이 불편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광주 · 전남 혁신도시를 추진하는 전남 나주시청 관계자는 "계획대로라면 이곳으로 이사올 공공기관들은 이미 땅 매입을 마쳤어야 한다"며 "내년 2~3월 청사 설계 발주는 물론 2012년 완공 목표는 꿈도 못꿀 형편"이라고 울상을 지었다.


# 눈치 보는 공기업들

통 · 폐합 절차를 진행 중인 16개 이전 대상 공공기관들은 내부적으로 사실상 이전 업무를 접었다. 전주(전북 혁신도시)로 옮길 한국토지공사와 진주(경남 혁신도시)로 가기로 돼 있는 대한주택공사는 오는 10월 통합 법인 출범을 앞두고 본사 이전을 어디로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다.

주공과 토공의 직원은 각각 4200여명과 2800명에 달하며 자산은 64조원과 41조원에 이른다. 토지주택공사를 손에 넣는 혁신도시는 임직원 7000여명을 거느린 거대 공기업을 품지만,그렇지 못한 혁신도시는 기본 설계부터 다시 해야 할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경남 혁신도시를 추진하는 경남개발공사 관계자는 "진주로 통합 법인 본사가 내려오지 않으면 중소기업진흥공단 등 나머지 11개 공기업의 진주 이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배수진을 친다.

대구 혁신도시로 들어가기로 돼 있는 한 공기업 관계자는 솔직한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권교체가 되면서 공공기관 이전에 공백이 생겼다. 공공기관들이 서로 눈치보고 있다. 새 정부도 강하게 재촉하지 않는다. 지방 균형발전이 제대로 될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혼자 앞서 나가면 또 그것대로 눈치가 보인다. "

그래서일까. 웬만해서는 자기네 공기업 이름이 이전 대상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표정들이다. 울산으로 내려가야 할 한국석유공사의 경우 서울 청사를 판 뒤 다시 임대해 사용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기관은 서울 잔류 인력을 최대한 늘리기 위한 명분 찾기에만 골몰하고 있다.

김천=조일훈/나주=장규호/진천=오상헌/진주=박신영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