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문학의 절대적 특징처럼 알려진 '마술적 리얼리즘'의 선구자인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년)는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유년 시절을 아버지의 서재에서 보낸 그는 청소년 때 이미 프랑스 문학과 독일 문학을 섭렵했으며,수십년 간 실명한 상태로 살아가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가 죽기 몇 해 전 기획한 세계문학전집이 있다. 1975년 이탈리아의 한 출판사는 보르헤스가 선정한 작가와 작품으로 문학전집을 구성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보르헤스는 카프카,도스토예프스키 등 거장의 대열에 오른 작가들부터 SF소설의 효시인 힌튼,고딕소설의 벡포드,환상소설의 카조트 등 장르문학 작가들까지 30명을 골라 그들의 작품을 가려뽑고 해설을 붙였다. 그렇게 탄생한 보르헤스의 세계문학전집이 바로 '바벨의 도서관' 전집이다.

'바벨의 도서관' 전집 한국어판은 최근 출간된 잭 런던의 소설집 《마이더스의 노예들》(김훈 옮김)과 체스터튼의 《아폴로의 눈》(최재경 옮김)을 시작으로 내년 말까지 3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출판사 측은 전집에 포함된 작가들 중 절반 이상이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고,작품 3분의 2가량이 국내 초역이라고 전했다.

전집에 들어간 작품들에는 보르헤스의 취향이 잘 반영돼 있다. 생전 "단 몇 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생각을 50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리는 짓,방대한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 나간 짓"이라고 말했다는 보르헤스는 평생 장편을 쓰지 않고 단편과 에세이,시,평론 등만 남겼다. 그런 그가 만든 전집답게 대부분 단편소설을 골라 채웠고 장편소설은 얼마 포함되지 않았다. 방대한 《아라비안나이트》는 주요 대목을 모은 요약본으로 전집에 들어갔다. 추리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학작품과 중국 청나라 시대 기담집까지 포함된 걸 보면 보르헤스의 폭넓은 독서 편력이 짐작된다.

전집의 이름인 '바벨의 도서관'은 보르헤스가 쓴 단편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독특한 표지 장정은 디자이너 프랑코 마리아 리치가 맡았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