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인 김 과장은 '회식 예찬론자'다. 자기 돈 안 내고 좋아하는 술을 마실 수 있으니 좋다. 그보다는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든다. 딱딱한 사무실을 벗어나니 온갖 아이디어가 나온다. 맺힌 걸 풀고 막힌 걸 뚫는 기회도 된다. 술 힘을 빌려 '실적 부진'을 해명(?)할 수도,때로는 상사에 대들어 맛보는'역린'의 짜릿함도 쏠쏠하다. 술 기운을 빌려 소원해진 선 · 후배 관계를 복원하는 것도 회식의 영원한 묘미다. 가끔 상사가 부하를 깨 회식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지만,실보다는 득이 많다는 게 김 과장의 경험이다.
이 대리는 다르다. 술은 웬만큼 한다. 그렇지만 분위기가 너무 싫다. 아무 의미 없이 돌아오는 잔을 목숨 걸고 마셔야 한다. 재미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화제에도 적당히 웃어 줘야 한다. 술의 종류와 화제,끝나는 시간 등을 상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도 참기 힘들다. 전국의 김 과장,이 대리에게 회식은 말 그대로 애증의 대상이다.
◆회포 푸는 게 회식? 공포일 뿐인데!
대기업 신입사원인 김기범씨(28).술 못하고 노래도 젬병인 그는 회식 자리에서 잘 취하지 않는다. 바짝 긴장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고 회식 문화도 달라졌다곤 하지만 개인별 주량을 무시한 폭탄주가 난무할 줄은 미처 몰랐다. 게다가 한두 사람은 꼭 필름이 끊기곤 하는 회식,그에게는 아직도 공포 그 자체다.
회식 때마다 '파도주''고진감래주''마빡주''충성주' 등 온갖 기상천외한 폭탄주 제조법을 배워 와서는 "열외 없다"를 외치는 상사가 저승 사자로 비쳐진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마루타냐'는 반발감도 치솟는다.
무엇보다 독재형 회식이 싫다. 그는 "팀장은 떠들고 팀원들은 듣기만 하는 일방 훈시가 한 시간 이상 지속되다가 술이 좀 들어가면 인사권을 들먹이면서 깨는데 누가 좋아하겠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술만 먹으면 했던 얘기를 낡은 축음기마냥 되풀이하는 상사의 뻔한 레퍼토리도 회식을 싫어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중견기업 입사 3년차인 이모씨도 회식 통보만 받으면 빠질 핑계부터 찾는다. 그는 "자기는 컨디션이 안 좋다며 반 잔씩 마시고,부하 직원들에겐 무조건 원샷을 강요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2차,3차까지 끌고 다니는 상사"를 회식 기피의 원인으로 꼽았다. 이씨는 "적당한 시간에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지는 못할망정 '내가 들어가기 전에는 아무도 못 가!'라고 외치는 상사가 요즘에도 있다는 게 정말 신기하다"고 털어놨다.
더욱이 앞뒤가 맞지 않는 상사의 태도도 싫다. "불만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자고 해서 좍 얘기했더니,2차 가서는 '무슨 불만이 그리 많냐'며 조지더라"는 이씨는 "회식은 직원들이 회포를 푸는 자리가 아니라 상사가 스트레스를 푸는 자리"라고 정의했다.
◆진상들만 없으면 그래도 나을 텐데
회식 기피증의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선 · 후배,동료를 막론하고 술자리에 존재하게 마련인 '진상'들 때문이다. 술만 먹으면 제 버릇 개 못 주는 게 그들이다. 화학 대기업 영업사원인 K과장은 아예 회식 때 참석자를 미리 파악하고는 '전과자'들이 있을 경우 자리를 일찍 뜨는 게 습관이 됐다. '취중 변신'하는 사람들의 주사가 불편해서다.
특히 팀장이 술에 젖은 화장지를 벽에 던지기 시작할 때면,그는 술 취한 척 뻗어 버린다. 팀장의 기행이 시작됐다는 예고이기 때문.끝까지 남아 있다가는 동틀 때까지 주사를 받아 주든가,지나가는 행인과 시비가 붙어 경찰서 순례를 해야 한다.
경력 사원으로 들어온 P과장도 K과장에겐 '블랙 리스트' 멤버일 뿐이다. K과장은 "호형호제하기로 약속해 놓고 다음날에는 아무것도 기억 못해 사람을 허탈하게 만든다"며 "회식은 육체적,정신적으로 엄청나게 노동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는 게 없는 자리"라고 진저리를 쳤다.
제약회사 J과장은 상사의 '야자 타임'에 순진하게 걸려드는 초년병 L씨가 이만저만 짜증이 아니다. 팀장이 야자 타임을 선언하면 L씨는 "너는 인간이 안 됐어"라고 곧바로 시비를 건다. 자기 딴에는 팀장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다고 하는 행동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팀장의 얼굴색이 변한다. 가슴이 철렁해 L씨를 말려 보지만 팀장의 상한 마음을 푸는 데 또 며칠을 투자해야 한다.
◆바뀌는 회식 문화,아 옛날이여~
모든 회식이 고역은 아니다. 신세대 직장인들이 늘고 경기 불황까지 겹치다 보니 회식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려는 움직임도 확대되고 있다. 횟수는 물론 규모,시간,비용 등이 이전보다 줄었다. 한 상호저축은행 L과장은 "부서별 예산이 줄면서 언제 회식다운 회식을 했는지 기억이 감감하다"며 "부서 이동이나 승진 인사가 있을 때도 팀원들이 구내 식당에 모여 간단한 음료나 피자를 시켜 먹는 것으로 회식을 대체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견 홍보대행사 C대리는 "메뉴가 쇠고기에서 돼지고기로 바뀌더니 이제는 치킨 등으로 다시 변했다"고 말했다.
2차나 3차를 가는 비용을 아껴 기억에 남는 회식을 만드는 회사도 늘고 있다. 반도체 설비 회사인 S사의 O대리는 "놀이공원에 가서 바이킹을 타거나 뮤지컬 관람 등 색다른 회식을 하는 부서가 늘었다"며 "얼마 전에는 프로야구 야간 경기를 보며 맥주와 도시락으로 회식을 했는데 1인당 3만원도 안 드는 비용도 맘에 들었거니와 왠지 제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에 짜릿했다"고 소개했다.
상사들도 무소불위의 권능만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I그룹 홍보팀 K과장은 최근 기분 좋은 회식을 했다. 오후 7시에 시작한 삼겹살 회식을 끝낸 뒤 스크린 골프장에서 팀장의 제의로 맥주 내기 게임을 즐긴 것.게임에서 이긴 팀장이 사 준 롤케이크를 들고 맥주 입가심까지 한 뒤 집에 들어온 시간은 오후 11시.그는 "늘 새벽까지 기다리던 애들과 아내가 입을 딱 벌리며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이런 회식이면 백 번인들 못하겠나 싶다"고 말했다.
그래도 '무장해제'식 회식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갈수록 '인간적 밀착감'이 엷어진다는 이유에서다. 한 제약회사 김모 영업팀장은 "피차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인간적인 결점을 발견하고 벽을 허물 수 있는 게 회식의 참맛인데,그런 기회가 줄어드니 어딘지 모르게 직장 생활의 감칠맛이 사라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털어놨다.
이관우/이정호/정인설/이상은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