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내 바지는 내 엉덩이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칫솔은 내 입안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구두는 내 발가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내 빗은 내 머리카락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귀갓길은 내 발자국 소리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아내는 내 숨소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된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바지도 칫솔도 구두도 빗도 익숙해지다 바꾼다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익숙해지다가 멈춘다

그렇게 바꾸고 멈추는 것들 속에 나는 나를 맡기고 산다

-고운기 '익숙해진다는 것' 전문


사람들은 새것을 찾아 난리법석을 부리지만,익숙한 것들에 늘 기대어 산다. 처음 산 구두를 반기는 것은 내 발가락이 아니라,내 머리일 것이다.

구관이 명관인 것은 새 구두가 발가락에 물집을 만든 뒤에야 알게 되지만,좋은 구두를 보면 견물생심의 욕구가 다시 생겨난다. 이사 온 뒤 첫 퇴근길,저절로 나긋나긋해진 내 발자국의 비겁함을 엿봤을 터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익숙함에 맞춰져 있는 존재일는지도 모른다. 이 시에 다음 연을 추가하면 어떨까. '오래된 어둠은 내 두려움을 잘 알고 있다'.

시인의 역설법으론 '나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일 것이다. 경제위기에 내성을 키워가는 분들은 곰곰 새겨보시길.

남궁 덕 문화부장 nkdu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