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 수학 포기했는데 원주율만 두달 외웠어요. "

한 곳만 응시하는 멍한 눈,오른쪽으로 10도쯤 기울어진 머리,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내는 강박증….

영화 '레인맨'속 더스틴 호프만의 모습은 이제 잊어야겠다. 영화 '다찌마와리'와 '식객'에서 팬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던 배우 임원희가 연극 '레인맨'의 레이몬드역으로 대학로 무대에 돌아왔다. 마치 진짜 자폐증을 앓고 있는 것같은 천재의 모습을 하고.

영화 '레인맨'은 1988년 영화로 만들어져 이듬해 제61회 아카데미 작품상,각본상,감독상,남우주연상 등 아카데미상 4개 부문과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한 명작.원작 영화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형과 차가운 성격의 동생이 자동차 여행을 떠나면서 우애를 확인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로드무비'다.

차창 밖 풍경들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면 연극 '레인맨'은 무대에서의 공간적 · 시간적 제약을 무대장치와 심리묘사로 절묘하게 극복해냈다.

특히 임원희 · 이종혁의 폭발적인 연기력이 '심리극 레인맨'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형제 간에 과거를 기억하는 장면에 가슴 찡하다가도 어눌한 임원희의 재치있는 연기는 폭소를 자아낸다. 무대 회전만을 적절히 사용한 절제된 무대세트가 배우에 집중할 수 있게 돕는다. 또 나무재질로 된 배경이 '가족애'를 말하려는 이 연극에 따뜻함을 더한다.

자폐증을 앓는 천재 레이몬드역을 맡은 임원희씨는 극중 숫자,연도,사람이름,국가명 등 엄청난 양의 대사를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놀라운 속도로 쏟아낸다. 암기력의 비결을 묻자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수학을 포기했는데,이 작품 때문에 원주율만 두 달 외웠다"며 "외워 말하는 분량이 많은 만큼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을 것 같다"고 멋쩍게 웃었다.

이번 연극버전에서는 냉소적이고 이성적인 이미지의 찰리역을 맡은 이종혁이 결말로 갈수록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상징적인 장면도 많다. 형제가 화해하게 되는 결정적 장면을 아버지를 상징하는 축구공으로 연결하고,자신만의 세계에 갇혔던 레이몬드가 마음의 문을 여는 장면을 영화에서처럼 춤으로 표현했다.

연출을 맡은 임철형씨는 "생계형 이산가족이 많은 요즘,잊고 있었던 유년시절의 형제애를 되살려보고 싶었다"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동생과 바보스럽지만 사랑이 넘치는 형의 모습을 무대에 다 담았다"고 말했다.

장면전환 때마다 잔잔하게 흐르는 비틀즈의 음악이 서정성을 더해준다. 대학로 SM아트홀에서 8월2일까지.(02)2051-3307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