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터뷰에서 기자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신에게 글쓰는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야, 일종의 작업이지요. 연애말이오" 나는 대답했다. 우선 내 소설 속 인물들에게 '작업'을 걸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작업'을 걸고, 심지어 원고지 에게 '작업'을 건다. 그게 나의 글쓰기다.

불타는 사랑이 없다면 누가 평생 남들 자는 시간에 홀로 깨어 앉아 원고지와 한사코 마주앉아 있겠는가. 밤새워 원고를 쓰고난 아침에 아내는 곧잘 '당신 일하는데 혼자 자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 내 대답은 이렇다. "미안하기로 치면 내가 미안하네. 왜냐하면 당신 재워놓고 밤새 내 주인공과 가슴 뻐근하게 연애하고 있었거든."

나의 대답은 진실이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나는 언제나 소설 속 인물들에게 푹 빠져 지낸다. 현실의 인물과 소설의 인물은 내 감정 속에선 똑같다. 나는 그들이 예뻐서 때로 가슴 설레고, 그들이 불쌍해서 때로 눈물짓고, 그들을 고통으로 내모는 세계구조에 대해 화가 나서 때로 부르르 몸을 떨기도 한다. 소설을 쓰는 전 과정은 그런 점에서 연애의 전 과정과 별로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만약 기자가 당신의 삶을 한마디로 말해보라 한다면, 나는 '시간과의 연애'라고 대답하고싶다.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에게 나는 매일매일 갖가지 방법으로 '작업'을 건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 겉으로는 하는 일이 비슷해도 내 마음 속에서는 어제와 오늘이 늘 확연히 다르다. 가령 내가 집안 청소를 하고 있으면 아내가 이렇게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당신 청소에다 목숨 건 사람같애. 좀 놀아가면서 해봐." 내가 청소와 연애로 만나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연애의 특징은 모든 것이 생생해진다는데 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의 개그에도 배꼽이 빠질 만큼 웃게 되고 일상적인 그의 무심한 눈빛 하나에도 가슴을 베인다. 연애를 동반한 희로애락은 습관적 일상에서 만나는 희로애락과 형태는 같을 망정 본질적으로 다르다. 열락과 눈물과 한숨과 갈등의 순간마다 수많은 추락과 상승이 깃들어 있다. 극적이다. 그래서 참된 연애란 평화보다 내적인 투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연애상태에선 절대로 권태와 무위가 깃들 여지가 없다. 만약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데도 권태롭다면, 그것은 사랑의 일시적인 중절이거나 사랑이 이미 사망한 것일 터이다.

사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예컨대, 어떤 이는 직장일에 에너지의 50%를 쓰고,가정 생활에 30%를 쓰고,취미 활동에 20%를 쓴다. 그는 직장에서도 쉬엄쉬엄 좀 심심하게 일하고 가정에서도 대충대충 습관에 오직 의존해 산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과적으로는 100%의 에너지를 쓰고 100이라는 인생을 산다.

그러나 또다른 어떤 이는 직장일에 에너지의 100%를 쓰고 가정 생활에 100%, 또 취미 활동에 100%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 이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따라서 삶의 정체성을 뜨겁게 확보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300%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놀라운 요술적 산술로 보면 결국 그도 100%의 에너지로 100의 인생을 살 뿐이다.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연애다. 전자의 인생엔 연애가 깃들어 있지 않으므로 외형적인 성공을 혹 거둔다 해도 권태롭지만, 후자의 스타일은 일상에 늘 연애의 본성이 깃들어 있으므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연애를 동반한 삶은 최소한 쓸쓸하지 않다. 그는 불황 때문에 좌절하지 않으며 환경을 핑계로 도덕성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연애는 희망이고 도덕이고 마르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