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영국에서는 질병이나 질환만으로도 사회적 신분을 가렸다. '최고의 질환'은 치질이었다. 쾌적한 사무실에서 앉아있는 직업에 주말이면 말을 타고 사냥이나 폴로를 즐길 처지가 아니면 걸리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반면 고혈압이나 당뇨같은 질병에는 연민이 쏠렸다. 영국인들의 해석이 별났다. '얼마나 먹고 살기에 급급했으면 자기 몸도 돌보지 못하고…'

우스갯소리로 여길 수 있고 과장된 말로도 들리지만 황당한 얘기만은 아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서 고혈압 하면 부자병이요,사장님병이라고 했었다. '풍채좋다'는 한마디로 과체중이 미화되고 부러움의 대상으로까지 됐던 게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질병들은 어느새 한국서도 고령화시대의 흔한 질병으로 인식된다.

질병은 시대에 따라 사회적 성격이 많이 달라진다. 천연두나 콜레라같은 전염병은 과거의 유물처럼 변했다. 대신 특정계층에 국한되던 각종 스트레스 관련 파생 질환이나 순환계 계통의 이상이 요즘엔 남녀노소 구별없이 나타난다. 사회 계층 구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령 과거 연탄가스 중독자가 그러했듯 골절상 환자들은 늘 서민 저소득층에서 많이 생긴다. 반면 사전예방이나 정기 건강검진과 같은 진료는 고소득층의 비중이 높고,최근으로 올수록 중산층도 의료비 지출항목이 높아진다. 이쯤 되면 '질병의 사회학'이라 해도 어색하지는 않을 듯하다.

우리사회도 질병구조만큼은 선진국형으로 가는가 싶었는데 최근 다소 엉뚱한 통계가 나와 시선을 끈다. 20~30대 결핵환자가 2003년 이후 최근까지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10만명당 80명꼴로,OECD 국가중 최고다. 그 이유가 더 관심거리다. 과도한 스트레스,다이어트,불규칙한 생활,과로 때문이라한다. 영양부족이나 열악한 생활환경과 밀접한 것으로 알려져 왔고 선진국에서는 노인성 질환으로 분류되는 결핵이 젊은층에 만연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결핵은 예방치료법에도 시사점이 있다. 평소 충분한 영양섭취와 정기적인 운동으로 면역력을 길러두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어려운 경제로 20~30대들에겐 학업이다,취업이다 해서 스트레스가 꼭지점에 달하는 요즘이다. 이럴수록 건전한 생활로 기초체력부터 제대로 다져놓고 볼 일이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