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49) 금하칠보 ‥ "무지개빛 칠보공예 '한국판 티파니' 로 키워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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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전 액세서리 공장 차려 80년대 한창 잘 나갈땐
손님들 100m씩 줄서기도 외조부ㆍ어머니 이어 딸이 경영
손님들 100m씩 줄서기도 외조부ㆍ어머니 이어 딸이 경영
'일곱 가지의 귀중한 보석 색을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을 지닌 칠보(七寶)는 금 은 구리 점토 유리 등의 틀(프레임)에 유약을 발라 디자인한 뒤 고온의 가마에서 녹여 굽는 전통 공예다. 구워진 칠보 유약은 유리처럼 단단해지면서 아름다운 보석 빛깔을 띠게 되는데 귀고리 · 목걸이 · 브로치 · 팔찌 · 반지 등 액세서리와 장신구는 물론 작품성이 뛰어난 실내 용품,실외 조형물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된다.
금하칠보(대표 박수경 · 36)는 박수경 대표의 외조부 김이두씨(85)가 1965년 액세서리 제조업체를 설립하면서 출발, 현재는 액세서리 제조에서부터 원재료 생산 · 판매,공예 교육 등 칠보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젊은 시절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가족부) 소속의 공예 기술자였던 창업주는 소록도 나환자촌에서 근무하다 1962년 경기도 부천의 청소년 직업훈련소 교사로 발령받는다. 하지만 평소 공예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공직을 그만두고 창업을 결심, 집(서울 은평구 응암동) 옆에 작은 액세서리 공장을 차렸다. 이와 동시에 남대문 삼호마켓에 액세서리 전문 매장을 내고 금하상회라고 이름 붙였다.
창업 초기에 진주 장식품을 만들어 팔던 그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남 김선봉씨(61)에게 당시 국내 유일의 칠보 공예가였던 고병호씨로부터 유약 제조 기술에 관한 가르침을 받을 것을 권유한다. 전통 기술인 칠보를 액세서리 사업에 접목시키면 '대박'이 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김선봉씨는 고씨 밑에서 1년 동안 기술을 전수한 후 칠보유약 제조와 제품 디자인을 담당하고 매장 경영과 판매 부문은 장녀인 김선경 회장(63)이 맡았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함께 회사를 꾸려 갔는데 창업주가 고혈압과 당뇨 합병증으로 갑작스럽게 쓰러지면서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이끌게 된다.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금하상회는 초고속 성장을 구가한다. 액세서리 제조업체가 몇 곳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하지만 값은 저렴한 칠보가 소비자 취향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에는 선물용 브로치 등을 사려고 손님들이 가게 앞에 100m를 줄 지어 기다렸을 정도였다"며 "하룻동안 들어온 돈을 자루에 쓸어 담아온 뒤 가족들이 다 같이 방에 모여 그날의 수입을 계산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해외로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일본,홍콩,대만 등에서 온 수입상들이 남대문 점포를 방문해 한 번에 칠보 액세서리를 1000~2000개씩 사갔다. 품질이 좋은데도 가격은 개당 1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쌌기 때문이었다. 최고로 장사가 잘되던 시절에는 한 달에 2000만~3000만원씩 매출을 올렸다. 당시 서울의 집 한 채 평균 가격이 300만원에도 못 미쳤다. 1981년에는 상호를 금하칠보로 바꾸고 동방플라자 등 몇몇 백화점에 매장을 입점시켰다.
그렇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칠보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눈높이가 높아진 국민들이 칠보보다는 순금이나 은을 먼저 찾기 시작한 것.또 100% 수작업으로 제작되는 칠보의 특성상 인건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채산성 유지도 어려워졌다. 김 회장은 "새로 지어진 잠실 롯데월드에 매장을 냈지만 하루 매출이 3만~4만원에 그칠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며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10년을 버텼지만 결국 1997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남대문 매장을 포함한 4개 매장과 공장을 폐쇄했다. 공장이 없어지면서 김선봉씨는 유약 제조와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남대문 지하상가에 있는 유약 재료상.김 회장은 이곳에서 유약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재고들을 팔며 사업의 명맥을 이어 갔다.
금하칠보가 현대적으로 재탄생한 것은 김 회장의 장녀인 박수경 대표가 회사 경영에 참여한 2004년부터다. 박 대표는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칠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외국 잡지들이 전통,공예,동양의 미 등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했다"며 "이런 기사를 보면서 우리나라 전통 공예인 칠보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이 들어 가업을 잇기로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취임하면서 칠보의 대중화와 고급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워 실천에 옮겼다. 우선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어 젊은 세대가 칠보를 집에서 손쉽게 만들어 볼 수 있도록 하고 인사동에는 칠보공예 체험 교육관을 열었다. 2005년에는 80만원가량 하던 가정용 가마를 20만원대로 제작해 각 가정에서도 부담 없이 구입해 칠보를 만들어 볼수 있도록 했다. 칠보가 대중화되면 될수록 회사는 각종 재료 수입과 함께 교육 사업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이와 함께 주문제작 방식의 고부가가치 상품 개발에도 나섰다. 회사에 디자인연구소와 마케팅부를 설치하고 브로슈어와 카탈로그를 제작,국내외 전시회 및 박람회에 참가해 바이어들을 만났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금하칠보는 이제 가장 인기 있는 귀빈용 선물 중 하나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현재는 신라호텔 등 특급 호텔에 개당 10만원이 넘는 칠보 액자,화병 등이 귀빈 선물용으로 납품되고 있으며 여수 엑스포 준비위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와 지난해 매출 8억원을 달성했다.
박 대표는 "칠보에 다시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직접 만들기 쉬운 데다 같은 유약을 쓰더라도 굽기에 따라 각각 다른 색깔이 나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 집집마다 가정용 가마를 보급해 우수한 전통 공예를 확산시키고 칠보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황경남 기자 knhwang@hankyung.com
금하칠보(대표 박수경 · 36)는 박수경 대표의 외조부 김이두씨(85)가 1965년 액세서리 제조업체를 설립하면서 출발, 현재는 액세서리 제조에서부터 원재료 생산 · 판매,공예 교육 등 칠보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젊은 시절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가족부) 소속의 공예 기술자였던 창업주는 소록도 나환자촌에서 근무하다 1962년 경기도 부천의 청소년 직업훈련소 교사로 발령받는다. 하지만 평소 공예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공직을 그만두고 창업을 결심, 집(서울 은평구 응암동) 옆에 작은 액세서리 공장을 차렸다. 이와 동시에 남대문 삼호마켓에 액세서리 전문 매장을 내고 금하상회라고 이름 붙였다.
창업 초기에 진주 장식품을 만들어 팔던 그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장남 김선봉씨(61)에게 당시 국내 유일의 칠보 공예가였던 고병호씨로부터 유약 제조 기술에 관한 가르침을 받을 것을 권유한다. 전통 기술인 칠보를 액세서리 사업에 접목시키면 '대박'이 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김선봉씨는 고씨 밑에서 1년 동안 기술을 전수한 후 칠보유약 제조와 제품 디자인을 담당하고 매장 경영과 판매 부문은 장녀인 김선경 회장(63)이 맡았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함께 회사를 꾸려 갔는데 창업주가 고혈압과 당뇨 합병증으로 갑작스럽게 쓰러지면서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이끌게 된다.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금하상회는 초고속 성장을 구가한다. 액세서리 제조업체가 몇 곳 없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하지만 값은 저렴한 칠보가 소비자 취향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에는 선물용 브로치 등을 사려고 손님들이 가게 앞에 100m를 줄 지어 기다렸을 정도였다"며 "하룻동안 들어온 돈을 자루에 쓸어 담아온 뒤 가족들이 다 같이 방에 모여 그날의 수입을 계산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해외로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일본,홍콩,대만 등에서 온 수입상들이 남대문 점포를 방문해 한 번에 칠보 액세서리를 1000~2000개씩 사갔다. 품질이 좋은데도 가격은 개당 1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쌌기 때문이었다. 최고로 장사가 잘되던 시절에는 한 달에 2000만~3000만원씩 매출을 올렸다. 당시 서울의 집 한 채 평균 가격이 300만원에도 못 미쳤다. 1981년에는 상호를 금하칠보로 바꾸고 동방플라자 등 몇몇 백화점에 매장을 입점시켰다.
그렇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칠보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눈높이가 높아진 국민들이 칠보보다는 순금이나 은을 먼저 찾기 시작한 것.또 100% 수작업으로 제작되는 칠보의 특성상 인건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채산성 유지도 어려워졌다. 김 회장은 "새로 지어진 잠실 롯데월드에 매장을 냈지만 하루 매출이 3만~4만원에 그칠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며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10년을 버텼지만 결국 1997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남대문 매장을 포함한 4개 매장과 공장을 폐쇄했다. 공장이 없어지면서 김선봉씨는 유약 제조와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제주도로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남대문 지하상가에 있는 유약 재료상.김 회장은 이곳에서 유약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재고들을 팔며 사업의 명맥을 이어 갔다.
금하칠보가 현대적으로 재탄생한 것은 김 회장의 장녀인 박수경 대표가 회사 경영에 참여한 2004년부터다. 박 대표는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칠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외국 잡지들이 전통,공예,동양의 미 등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했다"며 "이런 기사를 보면서 우리나라 전통 공예인 칠보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이 들어 가업을 잇기로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취임하면서 칠보의 대중화와 고급화라는 두 가지 목표를 세워 실천에 옮겼다. 우선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어 젊은 세대가 칠보를 집에서 손쉽게 만들어 볼 수 있도록 하고 인사동에는 칠보공예 체험 교육관을 열었다. 2005년에는 80만원가량 하던 가정용 가마를 20만원대로 제작해 각 가정에서도 부담 없이 구입해 칠보를 만들어 볼수 있도록 했다. 칠보가 대중화되면 될수록 회사는 각종 재료 수입과 함께 교육 사업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이와 함께 주문제작 방식의 고부가가치 상품 개발에도 나섰다. 회사에 디자인연구소와 마케팅부를 설치하고 브로슈어와 카탈로그를 제작,국내외 전시회 및 박람회에 참가해 바이어들을 만났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금하칠보는 이제 가장 인기 있는 귀빈용 선물 중 하나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현재는 신라호텔 등 특급 호텔에 개당 10만원이 넘는 칠보 액자,화병 등이 귀빈 선물용으로 납품되고 있으며 여수 엑스포 준비위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와 지난해 매출 8억원을 달성했다.
박 대표는 "칠보에 다시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직접 만들기 쉬운 데다 같은 유약을 쓰더라도 굽기에 따라 각각 다른 색깔이 나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나라 집집마다 가정용 가마를 보급해 우수한 전통 공예를 확산시키고 칠보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황경남 기자 knh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