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셨다. 방송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선종 소식이 날아들었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는 순간,갑자기 범용한 영혼의 앞에서 해와 달이 빛을 잃은 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또 하나의 역사가 사라지는구나!'하는 각성과 함께 등줄기로 전율이 지나갔다. 이제 등불들은 예전처럼 빛나지 않고,꽃들은 덜 예쁠 것이며,새들은 더 슬프게 울 것이다.

추기경님의 선종은 나눔과 무소유의 실천으로 우리 사회를 잔잔한 감동으로 적신다. 이 거인의 개결하고 향기로운 죽음은 메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처럼 물신(物神)에 들려 이리떼처럼 사납던 우리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다. 우리는 갑자기 기댈 만한 마음의 언덕을 잃어버렸다. 빈부와 세대의 구별 없이 몇십만에 이르는 자발적인 추모 인파가 줄을 지어 명동성당 일대를 에워싼 것은 그 상실의 슬픔이 온 누리를 뒤덮고 있다는 산 증거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과 함께 하고 유머와 소탈한 웃음이 빛나던 추기경님은 성실성과 부지런함으로 봉사하셨지만 우리 심장이 그렇듯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안 보이는 곳에서 쉼없이 일하며 우리 사회에 넘치는 활력을 주던 그 심장이 멈춘 것이다.

어려운 시절에는 불안하고 떨리는 여린 마음들의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거인! 그 거인은 작은 것들에도 "감사하고 고맙다" 하라고 이르시고,다시는 돌아올 길 없는 먼 길을 표표히 떠나신다.

추기경님의 거처가 언론에 공개되었을 때 나는 또 한번 감동을 받는다. 낡은 사제복과 헝겊 신발,오래된 성경,다리가 부러진 안경 몇 벌,손때 묻은 미사 제구(祭具)….그 광경을 보니 마치 추기경님의 검소하고 경건했던 일상을 기린 것 같은 한 편의 시가 얼른 떠오른다. '내 아침상 위에/빵이 한 덩이,/물 한 잔.//가난으로도/나를 가장 아름답게/만드신 주여.//겨울의 마른 잎새/한 끝을,/당신의 가지 위에 남겨 두신/주여.//주여,/이 맑은 아침/내 마른 떡 위에 손을 얹으시는/고요한 햇살이시여.'(김현승의 <아침 식사>)

추기경님은 빵 한 덩이,물 한 잔에도 고마워하신 분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을 갖고도 욕심을 다 채우지 못해 늘 허우적거리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마음이 헐벗어서 가진 것들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지 못한 채 천년만년 살 것처럼 꽉 움켜쥐었던 것은 아닐까?

선종하기 이틀 전 식사를 하시다가 율리아나 비서수녀를 보고 추기경님은 환하게 웃으셨다고 한다. 그 환한 웃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대신하신 것이다. 그 고맙다는 말은 말 그대로 진심이다. 우리는 많은 고마움을 잊은 채 산다. 지구의 자전,달의 차고 기움,파도의 오고 감,콩알에서 돋는 싹,피어나는 꽃들,그 많은 봄과 가을들,쉬지 않고 일하는 심장,어머니와 황금빛 저녁들,형제와 연인들,음악과 시와 동화들,까르륵 웃는 어린애들,우리 곁의 반려동물,숲과 새들,물 한 잔,맛있는 국수,오솔길들,땅을 적시며 흐르는 강,그리고 바다! 지금 여기에 강장동물이나 해조류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있음! 이것들은 고마워해야 할 기적들이다. 그 기적들을 고마워하지 않으니까 등뼈가 휘도록 수고하고도 삶은 보람이 없다.

고맙다는 말은 창조적인 용기의 징표고,어둡고 메마른 시대를 밝히는 빛이다. 평소 건네는 물 한 잔에도 고맙다는 말을 빠뜨리신 적이 없던 추기경님! 그 분은 움켜쥐지 않고 나누는 삶의 기쁨과 함께 고맙다는 말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깨달음을 주셨다. 그 분은 "서로 밥이 되어주십시오!"라고 이르신다. 우리가 서로에게 고맙다고 하고,서로에게 끼끗한 밥이 되어준다면 세상은 좀 더 평화롭고 살만한 것이 되리라.이게 그 분이 남긴 숭고한 메시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