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族譜)란 한 족속의 근원과 내력을 기록한 것이다. 예전같진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 족보의 무게는 지금도 결코 가볍지 않다. 뼈대 있는 집안의 증거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졸부 부자(父子)가 이름 있던 집안의 족보를 사고 싶어하는 내용의 드라마가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족보의 특성은 이렇다. '대물림된다.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소속감을 강화시킨다. 조금씩 추가되지만 기본적인 건 변하지 않는다. 있고 없음에 따른 차이가 상당히 크다. ' 그래서인가. 대학에선'기출문제와 그에 따른 모범답안'이 족보로 불린다.

오랫동안 같은 문제,같은 답이 반복되는 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족보만 구하면 시험범위 전체를 공부하느라 고생하지 않고도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너나 할 것 없이 족보부터 찾는다는 마당이다.

해도해도 너무 한다 싶었을까. 서울대 이준구 교수(경제학)가 올해 정시 합격생 대상 특강에서 서울대생 70~80%가 족보 학습을 하는 것같다며 제발 그러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요령만 찾다간 바보가 될 수 있으니 학점이 나빠도 제대로 공부하라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물론 족보만 얻는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족보 보는 법'의 항목을 보면 족보 학습도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알든 모르든 일단 한번 다 본다. 끝까지 본다,다시 한번 본다,지겹지만 또 본다,누가 이기나 생각하며 다시 본다,처음부터 답을 써본다,다시 한번 써본다,한번 더 체크한다. '

B마이너스만 받아도 재수강해야 하니 아예 F를 달라고 하는 경쟁자가 수두룩하다는 판국이니 족보를 무시하기가 쉽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교수의 말처럼 족보는 수동적 인간을 만듦으로써 독창적 사고는 물론 홀로서기를 방해할 수 있다.

사람들이 족보를 찾는 건 자신의 뿌리와 뼈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족보가 없다는 건 기댈 곳이 없다는 뜻이고 이는 거친 세상을 혼자 걸어가야 한다는 외로움과 고통을 안긴다. 그러나 사람은 외로울 때 보다 치열해진다.

족보에 의존해 안이하게 학점을 얻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 부딪쳤을 때 속수무책이기 십상이다. 족보를 얻기 위해 지연과 학연을 찾아 헤매는 시간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한다. 세상은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