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의 여유자금은 은행의 정기예금이나 증권사의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 안전한 금융상품 쪽으로 계속 흘러들어가고 있지만 정작 우량 기업들은 돈을 빌려 쓰지 않고 있다. 신용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기업들은 지난해 말 자금을 충분히 확보해놓은 데다 실물경기 침체가 의외로 심각해 필요한 설비투자마저 줄이거나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은행뿐만 아니라 개인들마저 돈 굴리기에 애를 먹고 있다.

◆1년 정기예금 이자 3%대 진입

우리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27일 현재 연 3.7%다. 이 은행은 지난해 10월만 해도 연 7%가 넘는 이자를 줬다.

농협중앙회의 정기예금 금리도 연 3.8% 수준이다. 국민은행(연 4.2%) 신한은행(연 4.13%)은 아직까지 연 4%가 넘는 이자를 주고 있지만 조만간 3%대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사에서 판매하고 있는 CMA 수익률도 지난해 말에는 연 5%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연 3%대로 떨어졌다.

금리가 이처럼 급격하게 떨어지는 이유는 '돈을 빌려달라는 곳은 부도위험 때문에 빌려줄 수가 없고,돈을 빌려줄 만한 곳은 자금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 시중은행 자금담당자는 "우량 기업은 돈을 안 빌려 쓰려 하고 막상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는 기업은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은행들이 돈을 안 빌려주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털어놨다.



◆넘쳐나는 시중자금

한국은행은 '자금조정예금'금리를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자금조정예금이란 은행이 지급준비금을 맞추고도 돈이 남으면 일시적으로 한은에 예치하는 자금을 말한다. 금리는 평상시에는 기준금리보다 1%포인트 낮아 현재 연 1.5%를 적용받고 있다. 다만 한 달에 두 번 돌아오는 지준 마감일엔 기준금리보다 0.5%포인트 낮게 적용해 연 2.0%의 이자가 지급된다.

금리가 낮고 기간도 하루에 불과한 자금조정예금에 돈을 많이 맡길수록 은행들은 손해를 보게 된다. 시중은행들의 평균 조달금리(총수신 기준)는 지난해 11월 연 4.86%로 자금조정예금 금리보다 훨씬 높다. 그런데도 은행들은 기업의 부도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는 판단 아래 자금조정예금 예치액을 늘리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1조~2조원 수준이었던 자금조정예금액은 최근 들어 10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불확실성 제거 시급

정부가 저금리 정책을 펴는데도 기업에 돈이 흘러들어가지 않고 가계는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이한득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량한 기업들이 투자를 해줘야만 경제 상황이 호전될 수 있는데 지금처럼 불안한 상황에서는 대기업도 은행처럼 자금을 끌어안고 있으려고만 한다"며 "구조조정 등으로 경제의 불확실성을 제거해 기업의 투자 의욕을 고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실물경제가 살아나야 가계도 증시 부동산 등 다른 투자처를 찾아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부실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한 상황 때문에 은행들이 위험 자산에 투자를 꺼린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규제를 좀 더 완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주식과 부동산이 투자 매력을 잃은 마당에 예금 금리마저 낮아져 가계가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은행이 기업에 돈을 돌게 해 한시라도 빨리 경기침체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기업과 가계의 동반 부실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태훈/박준동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