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던 지난해 말,삼성 내부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이런 전망을 내놓았다. "삼성전자에서 최지성 사장이 중책을 맡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려울 때는 독하게 조직을 장악할 수 있는 인물이 중용될 수밖에 없거든요. "이기태 부회장이나 황창규 사장 같은 스타들이 건재한데 최 사장에게 그런 기회가 빨리 돌아가겠느냐는 질문에 "글쎄,한번 두고 보시라"고 대답했다.

지난 16일 단행된 삼성 사장단 인사는 그의 장담대로 됐다. 최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하지는 못했지만 삼성전자가 생산 · 판매하는 모든 완제품 사업을 총괄 관장하는 '디지털 미디어 & 커뮤니케이션(DMC · Digital Media & Communications)'부문의 대표 경영자로 올라섰다. 연매출 100조원에 달하는 삼성전자 조직 절반을 휘하에 거느리게 된 것이다.

한때 이기태 전 부회장,황창규 전 사장에 밀린다는 평가를 받았던 최 사장이 이렇게 파격적으로 치고올라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첫 번째 답은 장악력이다. 2006년께의 일로 기억된다.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업부의 한 임원은 새벽 3시30분께 부랴부랴 수원사업장으로 출근했다. 30분 전에 최 사장(당시 디지털미디어 총괄)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미국 출장 중이었던 최 사장은 사업장의 몇몇 문제점을 지적한 뒤 개선 계획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꼭 그 시간에 회사로 나가야 했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 사장의 스타일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지시가 떨어지면 두 시간 내에 1보(첫 보고)를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불호령이 떨어져요. 늑장 부리다가 혼쭐난 사람도 있어요. "

그런 최 사장이 2007년 정보통신총괄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사업장과 협력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구미 지역은 패닉에 가까울 정도의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본사 보고를 받자마자 구미를 찾은 최 사장의 행보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시작한 회의가 자정을 넘겨 다음날 새벽에 끝났다. 참석한 임원들은 서슬 퍼런 질타와 추궁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최 사장은 서울 태평로 본사에 근무하던 정보통신총괄 임직원들을 모두 수원사업장으로 내려보냈다. 정보통신총괄은 '기세라면 삼성 내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이기태 전 삼성전자 대외총괄 부회장이 7년간 꾸리고 확장한 조직이었다. 최 사장은 그런 조직을 단 1주일 만에 장악했다. 그리고 전임자의 경영 관행과 방식을 완전히 걷어냈다.

최 사장을 대발탁으로 이끈 또 다른 요인은 확고한 목표의식이다. 그가 사업을 하면서 책정하는 목표는 회사의 공식 목표와 상당한 격차가 있다. 몇 년 전 회사가 세운 연간 LCD TV 판매목표가 150만대였을 때,최 사장은 임직원들에게 300만대를 제시하며 밀어붙였다. 물론 결과는 최 사장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지만 회사 목표치는 초과 달성했다.

휴대폰 사업을 맡고 나서는 부동의 세계 1위 노키아를 제치겠다는 야심을 내비쳤다. 많은 이들이 말만 앞세운 무모한 발상이라고 했지만 최 사장은 지난해 세계시장 점유율을 의미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노키아 추격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팎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최 사장은 덕장(德將)보다는 용장(勇將)에 가깝다. 신상필벌이 워낙 확실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임직원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완벽한 일처리를 선호하는 스타일이어서 사장실 앞에만 가도 주눅이 든다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의 성향이 어떻든 삼성전자는 당분간 '최지성의 시대'를 맞게 됐다. 기라성 같은 삼성 경영자들과의 경쟁이 일단락된 만큼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는 기대(?)가 나오지만 현 시장 상황을 보면 시기상조로 보인다. 오히려 이번에 인사와 조직을 획기적으로 쇄신한 그룹 분위기와 맞물려 예전보다 훨씬 더 매섭고 혹독한 방식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벌써부터 양대 사업부 임원들은 새벽 단잠을 깰 생각에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권한이 크면 책임 또한 무거운 법.삼성전자 6대 총괄사업부를 통폐합해 사실상 2개의 회사로 분할하는 실험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장래가 장밋빛일 수만은 없다. 더욱이 최 사장이 맡게 될 사업부는 삼성의 글로벌 브랜드 가치와 직결돼 있다. 단순한 실적 문제가 아니라 그룹 전반의 국제적 위상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얘기다.

당연히 해외 출장은 더욱 잦아질 것이고 세세히 챙겨야 할 업무는 출장으로 줄어드는 시간만큼 더 가중될 게 분명하다. 삼성전자 창사 이래 한 개인에게 이처럼 많은 역할과 과제가 집중된 적은 없었다. 과거 윤종용 부회장은 개별 사업을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었다.

따라서 최 사장은 지금 발탁의 기쁨보다는 천근만근처럼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과 맞닥뜨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향후 자신의 진퇴가 미래 삼성전자의 성패와 연결돼 있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있을 것도 자명해 보인다. 과거 이런 종류의 칼날 같은 긴장을 조직의 성과로 내놓았던 최 사장의 스타일이 이번에도 통할까. 삼성뿐만 아니라 국내외 산업계 관계자들이 무척 궁금해하는 대목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