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철 <부국장 겸 경제부장 gwang@hankyung.com>

금융을 주력사업으로 하지 않는 산업자본이 은행 지분을 4% 이상 갖지 못하게 막는 금산(金産)분리를 완화하는 문제는 십수년간 논쟁을 거듭해온 해묵은 과제다. 야당이 미디어 관련법과 함께 금산분리 완화 법안(10%까지 허용하는 은행법 개정안) 을 저지하면서 작년 말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지만 반대만 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자기자본비율이 낮아질까봐 대출을 꺼리는 은행권에 자본을 댈 수 있는 물주를 다양하게 확보해야 하고, 은행 규모를 키워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경제가 더이상 외국자본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더 절박한 이유다.

외국인에게 호되게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작년 한 해 외국인이 주식시장에서 빼내간 돈(순매도)은 34조원을 웃돈다. 원 · 달러 환율이 1500원 안팎으로 치솟았던 것도 외국 기관투자가들이 주식을 대거 팔아치운 탓이다. 고환율 여파로 멀쩡한 중소기업들이 부도위기에 몰렸다. 외국인이 팔고 나가는 거야 막을 수 없다지만 그 여지를 줬던 것은 그들의 주식 지분이 40% 이상 높아진 현실 때문이었다. 외국인 지분이 그렇게 높은 나라는 거의 없다.

주요 은행의 외국인 지분은 60%를 넘어 수조원의 이익을 낸들 그 혜택을 향유한 주인공은 알토란 같은 배당을 챙긴 외국인 투자자였다. 외환위기 직후 제일은행을 뉴브리지 캐피탈이라는 이름도 없는 사모펀드에 판 뒤 잘했느니 못했느니 시비가 붙었던 것이나,외환은행을 인수한 론스타를 두고 '먹튀' 논란이 인 것도 외국투자자가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먹튀 논란이 재연되는 것이 두려워 우리은행을 민영화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그렇다고 진보주의 성향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외국자본이 한국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지 못하게 장벽을 칠 수는 없다. 혹자는 예전처럼 외국인 주식투자 비중을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하고 하루에 원 · 달러환율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도 주식시장처럼 상하한선을 두거나 한번 들어온 외국자본은 일정 기간 잡아두자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쇄국정책이나 다름없다.

그런 상황에서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소유한도 확대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지속적으로 외국자본에 휘둘리는 꼴을 참아야 한다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로 전락하는 것이 두렵다고 하지만 그것은 기우다.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은 대주주가 은행 돈을 변칙적으로 빼내지 못하게 감시하는 금융감독원을 우습게 보는 것이고, 자율적으로 여신심사를 하는 성숙된 은행원을 얕잡아 보는 것이며,두 눈을 부릅뜨고 견제할 시민단체와 언론을 깔보는 것이다. 미니은행인 상호저축은행에서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만 그런 사고 한번으로도 대주주는 쇠고랑을 찬다. 은행 대주주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하기란 더욱 쉽지 않다.

금산분리 완화는 여야가 2월 중 '합의 처리'한다는 어정쩡한 약속으로 미봉했다. 십수년간 논란을 거듭해온 해묵은 과제가 또다시 이월돼 한국금융시장을 외국인 놀이터로 만들어주는 일은 없어야겠다. 위기 때 주식시장에서 수십조원을 빼내간 외국자본이 국내 투자자보다 먼저 주식을 사고 있는 것도 왠지 즐겁지만은 않다.